아르바이트 이야기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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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9가이드 작성일 23-01-31 18:26 조회 36,133 댓글 0본문
나는 아이린에게 가려고 욕실에서 양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관에서 벨소리가 났다. 치솔을 입에 문 채로 나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문 밖에는 지혜가 활짝 웃으며 서있다. 지혜를 거실 소파에서 기다리게 했다. 나는 양치를 끝내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지혜와 함께 오피스텔을 나섰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가보래잖아..........."
"엄마가?... 왜?.........."
"아까.. 오빠가 곧 온다고 했다며?..............."
"양치하고 옷 갈아입는데 15분이나 걸렸을까?.............."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 15분은 15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라?................."
지혜가 하는 말이 사실일까? 지혜가 기다리기가 지겨웠다는 말이 아닐까? 설마 아이린이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주 지겹다고
지혜를 내게 보냈을까? 우리는 2층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PC방 입구의 바깥쪽에 아이린이 서서 우리를 반긴다. 그런데
그녀는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어제만큼이나 화사하다. 지혜가 엄마에게 묻는다.
"왜.. 밖에 나와있어?........"
"응?... 여기가 너무 지저분해서 청소하느라고............"
그렇지만 내가 보니까 아이린이 한 말은 거짓말 같다. 평소보다 별로 지저분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청소를 한 흔적도 없다.
우리는 같이 PC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PC방에는 경식이가 카운터에 앉아있다. 경식이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한다.
"형!... 오래만......."
"그래... 반갑다... 너는 볼때마다 쭉쭉 크냐?.. 하하............."
"형은 볼때마다 멋있어져요?.........."
"나는 늙는다... 늙어... 벌써 주름살이랑 흰머리 엄청 생기거든............."
"그거 다 누나 때문이죠?... 하하.........."
"저게?.. 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데?............"
"얘들아... 고만 하고 이리 와... 밥 먹자........."
아이린은 카운터 옆에 있는 테이블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우리를 불렀다. 그녀가 준비해서 온 음식은 김밥과 초밥 순대였다.
경식이와 지혜는 한마디씩 한다.
"와아아... 우리 엄마... PC방 2년 하면서... 가게로 도시락 싸온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맞아... 난 또 라면일 줄 알았는데........."
"이거?... 내가 직접 해서 싸온 것이 아니고... 사온 거야............"
"사온 거면 어때?.. 어쨌든 라면이 아니잖아?... 나 라면 많이 먹어서 피부에 잡티 난대..........."
"엄마... 고마워요... 헤헤............"
나는 순대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 그 대신에 김밥과 초밥은 몇 개씩 먹었다. 아이린은 내가 먹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지혜나 경식이에게로 슬그머니 돌린다. 아이린의 옆 얼굴과 턱 그리고 목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참으로
단정하고 예쁘다. 오늘따라 약간 붉어진 뺨도 엄청 인상적이다. 경식이는 맛있게 먹지만 지혜는 몇 개를 깔짝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놓는다. 아이린이 지혜에게 뭐라고 낮은 소리로 말했는데 지혜는 아이린을 향하여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오빠... 난 오늘부터 당장 시작해야 해............"
나는 초밥이 넘어가다가 목에 걸리는 줄 알았다. 나는 물을 마심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 갑자기 왜 그러는데?......."
"오늘 지난 번 성적 전부 다 나왔는데... 그것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
"엄청나게 망했구나?..........."
나는 딱한 눈으로 지혜의 얼굴을 쳐다본다. 경식이와 아이린은 지혜의 입에서 계속해서 나올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나도 지혜가 할 폭탄선언을 기다렸다.
"오빠... 이건 뭐... 망한 정도가 아니야... 성적 때문에 자살한다는 애들이 이해가 된다니까.............."
이 말을 듣는 아이린이 갑자기 얼굴색이 확 바뀌며 지혜를 나무란다.
"야... 서지혜... 너 지금 말을 너무 심하게 한다고 생각 안 해?... 그런 말을 듣는 엄마 마음은 생각 안해주니?.............."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할 수 없어... 이건 내 인생이야.....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를 갈고 덤벼야 해..... 나한테 다른
선택은 없어................"
"뭘.. 하든... 어쨌든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말은 입밖에 꺼내지도 마... 말이 씨가 된대잖아?... 너무 끔찍해... 내가 이날까지
어떻게 키운 지혠데..............."
지혜와 아이린 사이에 말이 부드럽지 않게 오고갔다. 경식이는 굳은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혜와 아이린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고민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린의 얼굴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내 생각에 지금 지혜는 완전 초강수를 두고 있다. 지혜는 자살했다는 애들에 대한 말로 아이린과 나를 은근히 압박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관심사는 알바자리였다. 그런데 알바 자리는 해결 된 것 같은데 어제 저녁부터 지혜 문제가 내 인생을
뒤흔들고 있다. 이제 곧 아이린은 나에게 지혜를 위해서 뭔가를 해달라고 부탁을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절대 거절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겉에서 보면 지금 당장 지혜의 공부가 큰 문제인 것 같지만 내게는 그것보다 더 엄청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아이린의
눈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린의 눈물을 막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린이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일 눈물 한 방울만 흘리면 나는 이성을 잃고 뭔가를 저지를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걱정하던 일은 기어코 일어나버렸다. 아이린이 흐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린은 고개를 숙이고 아이린의
어깨가 흔들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식아... 너 가게좀 봐라..........."
"예..........."
"지혜는 엄마랑 같이 집으로 건너와............"
"우리 집?................"
"아니고 내 오피스텔............"
"알았어요..............."
나는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혼자 오피스텔로 와버렸다. 아이린의 눈물을 보고 나서 울렁거리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회사를 그만두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었다.
커피메이커에 커피를 얹었다. 커피향이 거실로 퍼지면서 구석구석을 채우기 시작한다. 한참 후에 머그 잔에 커피를 따라서
거실로 나온다. CD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파워 스위치를 눌렀다. 케빈 컨(Kevin Kern)의 Return To Love 가 흐른다. 이런
일의 맨 처음 시작은 시작은 한수정이다. 우리는 같은 과 같은 학년이었고, 우리는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CC(캠퍼스커플)로 맺어졌다. 모두들 우리를 부러워했다.
또 한수정은 뉴에이지나 프로그레씨브의 아주 광팬이었다. 나는 한수정으로부터 몇 개의 CD를 선물로 받았다. 그렇게 나는
뉴에이지에 전염된 것이다. 마음이 심난하고 머리 아픈 일이 생기면 이 음악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한수정에게 세뇌 당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많이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먼저 토라지는 것은 한수정이 아니고 나였다. 한수정은 늘 이런 말을 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나를 달랬다.
"자기야...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돼... 나한테 약속할 수 있어?..............."
우리는 헤즐렛이나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케빈 컨(Kevin Kern)의 Return To Love 를 같이 들었다. 나는 이 곡이 끝나면 꼭
한수정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2학년이 끝날 때 우리는 제각기 다른 길을 가버렸다. 나는 한수정을 감쪽같이 속이고 군에
입대해버렸다. 그 후에 내가 처음으로 휴가를 나오고, 우리는 어색하게 다시 만났다. 그 이유는 한수정이 내게 몇 일 후에
캐나다로 떠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김태현.....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잠시 헤어질 뿐이야.....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 줄 알지?..... 나는 결코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한수정이 떠나기 전날 밤을 같이 보내면서 한수정이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다음 날 한수정은 떠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 한수정이 더 이상 나를 달래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캐나다로 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나를 체념한 것으로
알았다. 나는 우리가 헤어진 것으로 알았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한수정을 지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적어도 제대할 때 까지는 성공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한수정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뉴에이지 CD는 한 장도
버리지 않았다.
한수정은 지금까지 가끔씩 내게 이메일을 보내온다. 나는 제대하고 나서 딱 한번 답장을 보냈다. 9월 학기에 복학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적었다. 한수정은 이번 해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많이 바쁘기 때문에 귀국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년 봄에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정말로 한수정은 Return To Love 를 원하는 것일까? 눈물에 젖은 눈망울.
이것은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한수정의 눈물 다음으로 나는 오늘 아이린의 눈물을 본 것이다.
내 마음은 PC방에서 이미 흔들렸다. 지혜와 아이린이 도착하기 전에 이 마음을 다시 가라앉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곡은 앙드레 가뇽(Andre Gagnon) 의 L"amour reve 로 바뀐다. 한수정의 말에 의하면 이 곡의 우리말
이름은 사랑의 품안에서 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알고있다. 앙드레 가뇽(Andre Gagnon) 이 사람이야말로 피아노의 시인이다.
한수정도 그랬다. 한수정도 밤 늦게 라이브 카페에서 앙드레 가뇽(Andre Gagnon)의 곡을 연주했었다.
한수정은 나를 달래면서 항상 오케스트라의 Return To Love 와 피아노 곡 L"amour reve, 이 두 곡을 계속해서 들었다. 나는
지금도 이 두 곡을 같이 듣는다. 이 음악이 끝나기 전에 그녀들이 도착하지 않기를 그리고 내 생각이 정리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런데 신은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녀들이 도착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녀들을 주방에 있는 탁자로 데려왔다. 아이린의
눈이 아직도 촉촉하다. 자살 얘기는 끝난 것으로 알고있는데 지혜는 그 다음에 무슨 말로 아이린을 울렸을까? 나는 아이린을
위해서 커피를 더 준비했다. 음악은 계속된다. 아이린에게는 커피를 지혜에게는 오렌지쥬스를 따라주었다.
"음악이 아주 죽이는데.. 오빠... 나도 커피 마시면 안돼?................"
"피부에 잡티도 생기고... 중추신경 자극제야.............."
"아이잉..............."
"태현씨... 지혜가 조금씩은 마시거든요... 걱정 마시고 딱 한 잔만 주세요..............."
아이린의 말 때문에 지혜에게도 커피를 따라주었다. 우리는 둘러앉았다. 이제 두 여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까 PC방에서
지혜가 리더였지만 지금은 내가 리더인 모양이다.
"지혜의 말대로 공부 당장 시작하자...... 그럼.... 됐니................?"
"예?... 아... 예에............"
지혜가 당황하는 눈치이다.
"그 대신에... 엄마를 울게 하지 말 것!............"
"태현씨... 그게 아니라... 지혜이 때문만이 아니라... 제가 좀 잘 울어요............."
<어제 밤에 지혜 말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던데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대신에 나는 내가
한 말에 단단하게 쐐기를 박아야 했다.
"엄마가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얼마든지 좋지만... 슬프거나 두렵게 해서 울게 하면... 우리는 같이 공부를 할 수 없다..
알겠니?..........."
"알았어요......................"
오늘처럼 아이린이 울어버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는 제일 먼저 손을 썼다. 지혜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태현씨... 그럼 공부는 어디서 하죠?... 우리 집은 너무 좁아서 안될 텐데..............."
"여기는 안되는데..........."
"그럼... 이 건물에 오피스텔 하나를 얻을까요?........."
"에이... 공부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면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애들 교육비는 전부 아빠가 부담하거든요........"
"오빠... 걱정하지 마... 우리 아빠 돈 엄청 많아.............."
"만일 이 건물에 얻으면 가게에서 엎드리면 코앞이니까... 내가 자주 와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오피스텔을 얻는 것은 아이린이 알아서 하기로 했다. 내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주중에는 지혜 혼자만 공부하고 주말에는
지혜랑 경식이가 같이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린과 지혜는 불만이다. 날더러 그 나라마트에 왜 굳이 다니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내 생각은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서 여기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혜는 정규수업만
하고 보충수업은 모두 빼겠다고 했다. 또 엄마가 차로 실어오면 여섯시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퇴근해서
오면 여섯시까지 도착할 수 있으므로 나는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했다.
아이린은 지혜를 먼저 가게로 돌려보냈다. 아마도 과외비 때문인 것 같다. 지혜는 눈치를 채고 혼자 방을 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아이린은 사업가이다. 아마도 아이린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지혜와 이야기가 된 것 같았다.
"지혜가 학교에서 애들한테 알아보니까.. 지혜 혼자만 300은 들어야 한대요... 그럼 우리는 둘이니까 태현씨가 100만 깎아서
500에 해주시면 좋겠는데............"
"그러지 말고... 처음에는 300으로 시작하세요... 그리고 애들이 공부가 되고 탄력을 받으면 그 때 가서 다시 얘기하든가
하시죠?......."
"그렇게 하면 아빠가 싸구려 과외라고 못하게 할껄요........."
"으음........."
"지혜 입에서 자살 얘기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애 아빠가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대요..... 제발 이상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잘좀 부탁해요......."
"사장님... 지혜가 자살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자살하는 애들 심정이 이해가 된다고 한 것 같은데......"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달라요?... 앞으로 졸업할 때 까지 성적이야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할텐데... 내려갈 때 마다 그런 애들
심정을 이해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혜도 그런 생각을 안하겠어요?..........."
"글쎄요............."
"아빠 뿐 아니라... 아빠의 아내 되는 여자도 지혜 때문에 지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거든요............"
"그 분은 왜요?..........."
"아빠가 자기랑 재혼하는 문제를 지혜나 경식이가 사춘기인라서 엄청 조심했거든요... 지금도 우리 애들 문제는 아빠보다 그
여자가 더 걱정해요... 자기가 들어와서 잘못 될까봐 그런대요............"
나는 아이린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린은 마치 지금 당장 지혜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걱정
하는 것 같다. 이제 그녀의 눈에 눈물은 없어진 것 같다. 그 대신에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혜가 얄밉다. 그 말 한마디를 해버리는 바람에 아이린의 전 남편 또 그의 새 아내까지 세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것이다. 수업은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방이 구해질 때까지 내 오피스텔에서 하고 나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지혜나 경식이가 수업이 끝나고 이리로 오면 내가 없어도 여기서 공부하면서 기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태현씨... 혹시..........."
"네?............."
"우리 나가서 와인 한잔 할래요?.............."
"네?.........."
"내 걱정거리가 태현씨한테 넘어간 것 같아서 미안한데............"
"그러시죠... 그럼 경식이랑 지혜는요?.............."
"내가 건너가서 먼저 집에 들여보낼께요... 30분쯤 후에 집 앞에서 만나요............"
그녀는 가게로 갔다. 아이린이 와인 마시러 나가자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이린의 마음이 복잡하겠거니 하고
따라 나서기로 했다. 우리는 밖에서 만나서 택시를 타고 가까운 신촌으로 가서 내가 자주 가는 와인바로 갔다. 우리는 치즈
조각을 씹으면서 와인을 마셨다. 약간 어두우면서도 푸른 빛이 나는 실내 조명에서 아이린의 얼굴과 목까지의 피부도 푸르게
보인다. 나는 레드와인 드라이를 그녀는 화이트와인을 마셨다.
"이제 우리 애들 선생님이니까 태현씨라고 부르면 안되는데..........."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부르세요... 내 이름이 태현인데 뭐 어때요?............."
"그래도........."
아이린은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를 쳐다본다. 아이린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로 흘러내려
눈매를 살짝 덮는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려주었다.
“죄송해요... 보는 내가 너무 답답해서요............”
그렇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은 아까처럼 다시 내려왔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내 가슴을 콩콩 쳤다. 아이린은
이런 나를 보고 조용히 웃었다. 첫번째 잔이 끝나고 우리는 두번째 잔을 마시기 시작했다.
"내 애들이 언젠가부터 나한테 엄청 걱정거리였는데.. 태현씨를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이제 그 걱정이 사라지려나?..."
"사장님..... 지혜나 경식이는 사장님께도 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들일 뿐이죠..... 우리가
걔네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하는 거죠............."
"그런가?.........”
"......"
“애들 키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내가 겁없이 괜히 이혼했나봐..............."
아이린은 내 와인 잔을 바라보더니 내게 물었다.
"태현씨 마시는 그 와인 한 모금 마셔봐도 될까?........"
"네?... 그러세요............"
나는 내가 마시던 곳을 아이린의 반대쪽으로 가도록 해서 내 와인 잔을 아이린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아이린은 내 잔을 들고
내 입이 닿았던 곳을 찾았다. 그녀는 거기에 입을 대고 가만히 있다. 한참 만에 잔을 입에서 떼고 천천히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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