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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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악!........”
“뭐야!... 왜 그래?.............”
“저기... 저기... 저... 저기...............”
“어... 억!... 저... 저... 저게 뭐야?...............”
그 년이 비명을 지르고 부르르 떨자 그 년의 비명에 놀란 그 년 남편 역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주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둥그렇게 뜬다. 하긴 출근을 준비하고 있던 그년의 남편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혀를 길게 내 뽑은 채 자신이 살고 있는 15층
아파트 창문 앞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당황스럽기도 했을 거다.
“여보... 저사람 박 진호 아냐?..........”
“으... 으... 으... 하아... 하... 아...............”
“정신 차려... 당신이 왜이래?.............”
그 년은 몸을 덜덜 떨더니 결국 자리에 넘어져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는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뭐라고요?... 지금 거기가 어디십니까?..........”
“동구 범일동 A아파트 109동인데요... 우리 집 창문에 사람이 목을 맨 채 매달려있어요............”
“예... 즉시 출동하겠습니다... 정신 차리시고 경찰에도 신고하세요..........”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어!... 저게 뭐야?... 사람 아냐?..........”
“그런 모양이네... 저기에 사람이 왜?................”
출근길에 나섰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 모두가 하늘을 향해서 고개를 치켜든 채 15층 높이에 매달려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까지는 싫었는데 그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복수의 방법을 찾았지만 그년에게 망신을 주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또한 기껏 그 년에게 망신을 준 대가로 나 역시 망신을 당하는 것 말고도 또 나에겐 ‘사내놈이 치사하게.’ 라는
수식어까지 더해질 것이니 망신을 주는 일만으로는 나에겐 밑지는 장사였다. 그렇다고 누구에겐가 청부를 하여서 그 년을
죽이든지 내 손으로 산 사람의 목숨을 끊고서라도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을 사람을 죽였다는 그 손가락질을 감당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내 스스로 죽으면서 그 년의 더러운 행적을 세상에 고발하는 것이었다.
실제 창녀의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고한 척, 순수한 척, 우아한 척하면 뒤로는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맡기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던 가증스러운 년이다. 학창시절 한 여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 이후 여자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기대도 가지지 않은 채 결혼조차도 ‘사랑’이란 그것이 아닌 주변의 강권과 집안의
장손이라는 그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이란 굴레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한 나쁜 년의 더러운 꼬임에 빠져서
또 다시 처참한 배신을 당했다. 여자란 존재에 대한 무지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이였다.
사실 결혼 후 아니 학창시절 나를 배신하고 떠난 혜진이와의 일 이후에 나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우연히 한 채팅사이트에서
만났던 수진이 부천에 살고 있었던 그녀는 언제나 나에겐 천사였었고 나 또한 남편의 외도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던 그녀에게
그녀를 항상 따스하게 품어주는 햇살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장애가 되지 못했고 내가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그녀는 비행장 입구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고 또 다른 어떤 날은 서로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만나 사랑을
불태웠었다. 5년을 불같이 사랑하던 우리는 어느 날 문득 그녀의 남편이 정신을 차렸는지 가정으로 다시 돌아와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고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남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에 내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나 역시 그녀를 진정 사랑했기에 그녀의 앞으로의 생활이 행복하기를 빌면서 고이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진이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열병을 앓듯이 앓아누웠다가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은 나에게 여자는 없으리라 믿고 기원했다.
배신도 아팠지만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은 그 배신의 아픔과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처절한 고통이 수반되어서
난 더 이상 내 인생에 여자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정말 어떤 여자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따금 아내이외의 성적인 욕구가 생길 때면
채팅사이트에서 알고 지내던 가벼운 상대들과 일회성 만남으로도 그 욕구는 충분히 풀 수 있었기에 굳이 ‘사랑’이라는 굴레로
나 자신을 속박하길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나와 인연을 맺었던 여자들은 내가 내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장한 냉정함이 그녀들에게 오히려 끌림으로 작용했던 모양이었다. 여자들이 혹할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도
많지도 않은 내가 여자에 궁하지 않았던 그 이유가 혹시 여자들이 ‘나쁜 남자증후군’ 그 현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난 그년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 년이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무슨
이유로 그 년에게 내 전화번호를 주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긴 정치판에서 생활하다보면 그 전화번호란 것이 별
대수로운 일이 되겠는가? 선거만 끝나면 바뀌는 전화번호들 일만 생기면 생겨나는 내가 가지고 다니면서도 명함에 적혀있는
단체가 도대체 뭐하는 단체이며 내가 언제 가입해 있었는지도 모를 그런 단체들의 이름 아래에 선명히 찍혀있는 내 이름
석 자. 그것이 이 대한민국의 정치판 현주소인 것이다.
아무튼 이미 죽은 내가 살아있는 여자들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가? 오히려 그래도 죽기 전에는 유서일 수밖에 없는 그 년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기 위한 목적으로 완성해둔 소설 아닌 소설을 A4용지에 깔끔하게 프린트해서 마치 책처럼 철까지 하고
나서 이 아파트 옥상에 내 휴대폰 지갑과 함께 가지런하게 놓아두고 비록 죽은 시체지만 사람들에게 깔끔한 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이왕이면 조금 덜 흉측하게 혀를 빼무는 모습과 눈이 뒤집히지 않게 고통 속에서도 눈을 굳게 감고 견디는 연습을
수차례 했었는데 육체를 떠난 내 육신을 지켜본 나는 나란 인간의 나약함에 찌를 떨었다. 눈은 흰자위가 허옇게 드러난 채
까 뒤집혀 있었고 혀는 있는 대로 쭉 뽑혀서 축 늘어져 있었고 거기까지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망신스럽게도 그 순간의
고통을 참지 못해서인지 내 깨끗하게 다려 입은 바지가 축축해져 망신스러운 모습으로 있었다.
난 사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 조금 더 아주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멀쩡하게 아내가 있고 딸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들 보다는 멍청하기도 한 가증스러운 년의 말과 행동에 내 모든 것을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든 그 죄책감과 내가 보였던 그 어리석음으로 인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꼭
그 년의 죄에 대한 응징을 해야겠다는 그 마음이 내 오늘의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난 죽었다.
그 년과의 인연은 그 년의 전화 한통에서 시작되었다.
“박 비서님 오늘 사무실에 가세요?...........”
“예... 지금 가는 도중입니다...........”
“저... 지금 양정에 있는데 아직 양정 안 지났으면 사무실까지 좀 태워주실래요?...........”
“예... 한 십 분이면 양정에 도착합니다... 지금 계신 곳은 어디십니까?.........”
“양정 소방서 옆에 친구들이랑 커피숍에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연제구청 지나면서 전화를 드릴 테니까 그때 준비해서 나와 계세요..............”
“네..............”
‘이 여자가 뭐 친하다고 전화를 했지?’ 하는 생각보다는 평소 전화는커녕 농담조차 제대로 하며 지낸 사이도 아닌데 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그것이 더 황당했다. 아무튼 약속은 했으니 연제구청을 지나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양정소방서를
지나치고 나서 100여 미터를 더 갔음에도 이 여자가 보이질 않는다.
“여사님 어디에 계십니까?..........”
“박 비서님은요?..........”
“양정소방서를 지나서도 안 계시기에 다시 구청 쪽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바로 나가있을게요...............”
그 년과의 통화를 끝내고 난 비상등을 켠 채 연제구청에서 다시 양정소방서로 향했다. 앞에 그 년이 보였다. 그리고 그 년의
친구인 듯한 두 여자가 보였다.
“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날씨도 쌀쌀한데 차 안에 있는 제가 기다리는 게 옳죠.........”
“여긴 제 친구들이에요.........”
“예... 반갑습니다... 박 진호라고 합니다...........”
“예... 전 진경이구요... 이 친구는 정애라고 해요..........”
“예... 세 분 오늘 좋은 일 있으셨나 봅니다..........”
“아뇨...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커피나 마시러 나온 거예요...........”
“아... 예.........”
별 중요하지도 않은 잡담 속에 사무실이 가까워졌다.
“저희는 여기 좀 내려주세요... 마트에 들러 시장 좀 보고 가게요..............”
“예.... 그럼... 잘 들어가세요.................”
세 여자의 수다에서 벗어나 차를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 바쁜 일이 없고 또 누군가 있어봐야 걸리적거리는 일 밖에 없기에
당분간 사무실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당직자들에게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기에 사무실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지은이라도
있었다면 그녀 만큼은 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바쁘세요?.............”
“댁에 가시지 않고요?.........”
“집에 가도 특별히 할 일도 없어요..............”
“예...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아뇨... 제가 타드릴게요.............”
“아뇨... 그냥 앉아계세요....................”
내가 종이컵을 내밀자 그녀는 다소곳이 커피를 받아든다.
“고맙습니다..........”
“뭘요...........”
“박 비서님은 매일 출근 하세요?.............”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사무실에서 혼자 노는 거죠..............”
“심심하시겠다...............”
“전혀요.... 전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 잘 놉니다...”
“이따금 놀러 와도 되나요?............”
“예...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정말요?............”
“예... 당원이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오신다는데 당연히 환영할 일이죠..........”
“제가 놀러오면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죠............”
“방해랄 게 뭐 있겠습니까... 걱정 마시고 언제든 오세요...........”
커피를 마시고 조금 더 잡담을 나누다가 그녀가 일어선다. 그러더니 시장바구니에서 빵과 티백에 든 음료를 꺼낸다.
“박 비서님 커피 몸에 좋지 않거든요... 커피 대신에 이걸 타 드세요... 그리고 이 빵은 따님 주시고요.............”
“아이고...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냥 댁에 가져가서 드세요.............”
“아니요... 아까 태워주신 거 고마워서 그래요..............”
실랑이 끝에 결국 그년은 빵과 티백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장바구니가 무거워 보인다.
“댁이 어디세요?...........”
“A 아파트요.......”
“그거 들고 가시기 무거우실 텐데 제가 태워드릴까요?..................”
“정말요?...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그 년은 나를 보고 생긋 웃더니 앞장서서 사무실 계단을 내려갔다. 나 역시 뭔가에 홀린 듯 그 년의 뒤를 따르고 그 년이 살고
있다는 A 아파트로 가서 그 년을 내려다 주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다시 가셨어요?...........”
“예..............”
“심심하시겠다..............”
“별로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 잘 놉니다..............”
“저... 진짜 이따금 놀러 가도 되죠..............”
“예... 언제든지요................”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그 년은 내게 전화를 걸었고 또 별 영양가 없는 말들만 계속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날
그 년의 차를 태워달라는 그 말을 냉정하게 거절했어야 했었는데 하긴 누가 그 시점에서 그 년이 나를 죽게 만들 원흉인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톡이 울려 이 시간에 누굴까 하고 열었더니 그 년이 이모티콘을 날린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벌써... 일어나셨네요?.........”
“항상 일어나는 시간이니까요... 그런데 아침부터 톡을 하시면 서방님 삐지실 건데요............”
“남편 운동 갔어요.............”
“아... 부지런한 분이시네요..........”
“오늘은 뭐 하세요?...........”
“저야 항상 똑 같은 일과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럼... 낮에 시간 있음 놀러 갈게요...............”
“예... 오늘도 즐겁게 보내세요............”
“놀러 간다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톡이 끝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한 후 출근을 준비했다. 대선에서 패한 후 지역위원회 사무실은 할 일이 없다.
의욕 또한 없었겠지만 아무튼 그 년은 낮 시간에 사무실에 오지를 않았다. 저녁 즈음에 ‘죄송해요. 친구들과 만나느라.’ 라는
톡 메시지를 끝으로 어차피 그 년이 오든 않든 내게는 무관한 일이었다. 당원이 사무실을 찾으면 커피나 대접하고 말 상대만
해주면 되는 일이니 원래 내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튿날 아침 그 년은 또 6시가 조금 지나자 톡을 보내온다.
‘Hi~’
‘예... 오늘도 즐거운 하루 만드세요.............’
그 년의 톡은 매일 아침 나를 깨우는 알람이 되었다. 어떤 날은 시간이 되어도 톡 알림이 울리지 않으면 연신 톡을 기다릴
정도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항상 그러했듯이 아침에 텅 빈 사무실에 출근해서
뜨거운 커피를 마신 후 컴퓨터 앞에 주저앉아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심심하면 웹서핑도 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도
다운받아 CD로 구워서 이것은 누구에게 줄까 고민하기도 하면서 그런 평온한 나날들이다.
“사무실이에요?.........”
“예... 사무실입니다................”
뜬금없이 전화를 하고선 내가 사무실이란 말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10분이 흐르자 사무실 문이 열리고 그 년이 들어선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그냥요.............”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예.............”
“저녁시간이 다 되었는데 서방님 저녁은 준비해놓고 나오셨나요?............”
“신랑 시골 갔어요..............”
“같이 안가시고요?.............”
“같이 가봐야 친구들하고 논다고 정신없는데 거길 왜 따라가요.............”
“애들은요?..............”
“하나는 서울에 있고... 하나는 고등학생이에요...............”
“예...........”
“오늘 바람 좀 쐬게 차 좀 태워주세요.............”
“어디 가실 곳이라도?................”
“그게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요...............”
“아... 예... 그럼 바다구경 가실래요?............”
“좋죠................”
대충 사무실에서 해야 할 잔무를 처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겨울 송정해변은 황량함 그것이었다. 하긴 접근성에서 광안리나
해운대에 비교해서 떨어지니 당연히 황량할 수 밖에 없다. 난 내 지정석인 46번 자리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차에 남겨둔 채
커피데크로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아메리카노 연한 것 한잔하고... 보통 한잔요..............”
커피를 주문한 후 진열되어있는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조수석 문을 발로 툭툭 차니 그 년이 문을 열고 커피를 받는다.
“고마워요... 분위기 좋네요.............”
“예... 부산 바다 중에는 송정이 가장 좋아요... 특히 겨울바다는...............”
“그런데... 박 비서님 정말 애인 없어요?............”
“당연하죠... 어떤 여자가 저 같은 사내를 좋아라하겠습니까?................”
“................”
“저... 맥주 한 캔만 사주실래요?.............”
“예.................”
한동안 말이 없던 그 년이 뜬금없이 맥주를 찾는다. 난 그 말에 차를 뽑아 편의점 앞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맥주 하나와 안주가
될 만한 과자를 골랐다. 초면에 오징어나 쥐포 등을 안주로 하여 뜯기에는 그 년의 입장에선 난감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난 그 년은 나를 보며 쌩긋 웃었다.
“추하진 않죠?...........”
“맥주 드시는 게 추할 일이 뭐 있나요?............”
“여자가 혼자 청승맞잖아요.............”
“전혀요... 그냥 편안하게 드세요... 제가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대작이라도 해드렸을 텐데...........”
“고마워요... 나이가 마흔이 넘고 나니까 사는 게 허무하고 그래요............”
“그럼... 애인이라도 만드셔서 삶에 활력을 찾아보시지요............”
“애인을 아무나 만들 수 있나요?...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되지.............”
“아이고... 여사님 정도면 충분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꼭... 외모만 가지고 평가하는 게 옳은 것은 아니지만... 여사님 정도면 남자들 줄을 설걸요?............”
“고마워요... 그런데 박 비서님은 왜 애인 안 만드세요..........”
“대충 아시겠지만 애인 만들 능력도 없고... 또 정치판에서 여자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면 그걸로 게임아웃이잖아요...........”
밤바다에 인적이 드물어지고 밤이 깊어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가까이 되었다.
“이제 들어가셔야죠... 벌써 11시인데...............”
“예................”
그 년을 태우고 송정을 나와 광안대교에 차를 올렸다. 광안대교의 야경을 보며 그년이 탄성을 내 뱉는다.
“와... 정말 예쁘네요.............”
황령터널을 지나 그 년이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니 그 년이 살고 있는 109동 입구까지 가주길 원했다. 솔직히
아파트 경비원의 눈에 뜨여 좋을 일이 없는데 아무튼 그 년의 요구에 따라 그 년을 입구에 내려주고 난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박 비서님 오늘 고마웠어요..........”
“예... 여사님 저도 즐거웠습니다... 편한 밤 되세요.............”
신호를 받아 대기 중 그 년에게서 톡 메시지를 받고 대답을 해주었다.
‘Hi~’
그년이 보낸 톡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예... 그런데 서방님 전화는 오지 않았던가요?.............”
“신랑은 시골가면 항상 술 때문에 뻗어요..............”
“아... 예... 아무튼 주말 잘 보내세요.........”
“예... 그런데 박 비서님은 제가 싫으신 모양이네요..........”
“싫을 일이 뭐 있습니까........”
“피... 그런데 톡만 하면 금방 끝내려고 그러세요?..........”
“그냥... 특별히 제가 여사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그렇잖아요.............”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를 나열하다가 톡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집사람과 딸은 주말이라 처가에 가 있기에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집을 나와야 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사무실로 올라갔다.
“형님... 아침에 웬일이세요?... 제가 전화를 드릴 테니 끊으세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선배의 가벼운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자신이 전화를 건다고 한다. 이 후배는 내가 개인적인 일로
심심찮게 신세를 지는 후배다. 한때는 태권도 사범으로 세계를 휘젓고 다니다가 국내에 정착해서 지금은 수도권의 대형 입시
학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후배, 참 순수하고 성실한 후배이다.
“응... 그동안 잘 지냈어?.............”
“예... 형님 덕분에요.............”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당신 덕분에 잘 지내지 어떻게 당신이 내 덕분이여..............”
“무슨 그런 말씀을요... 그런데 아침에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혹시... 어려운 일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저도 지금은 형편이 좀 좋지 않아 큰돈은 안 되겠지만 얼마간은 돌려드릴 수
있어요..............”
“이 사람아 돈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야... 그냥...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라니까................”
“예... 아무튼 형수님과 진영이도 잘 지내죠?..............”
“응... 어차피 집사람이야 항상 그렇고... 진영이도 학생인데 특별할 일이 있냐..........”
“다행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집에는 다녀온 거야?..........”
“아직 신입이라서 명절 때 못 가뵈고 조만간 휴가내서 부모님 찾아뵈려고요............”
“그려... 하긴 당신이야 그런 일은 알아서 잘 하니까.............”
“형님... 언제 서울 한번 올라오실 일 없으세요?............”
“지금 당장은 계획이 없는데..........”
“예... 저도 형님 뵈러 부산에 가야하는데 묶인 몸이라 쉽지가 않네요............”
“일단 돈 벌기로 했으면 열심히 돈을 벌어서 모아... 그래야 당신이 원하는 일도 추진할 수 있으니까..........”
“예... 형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청배와 전화통화를 마치고. 이왕후배에게 전화를 한 상황이라
또 다른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이 시간은 그 친구에게는 이른 시간이지만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다. 한참을 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긴 이 시간이면 그 후배는 한 밤중일 것이다.
“진호 형... 전화 하셨네요?............”
“응... 일찍 일어났네?........ ㅋㅋ”
“예... 형 전화소리에...........”
“아... 미안해... 오랜만에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안 받기에 끊었지.........”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고요?........”
“응.. 그냥 건 거여... 장사는 잘돼?..........”
“장사야... 직원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제가 뭘 아나요?...........”
“문디... 오너가 그렇게 얘기하면 직원들이 좋아하나?.........”
“형... 우리 가게는 국내에 몇 개 없는... 노동인권 자율매장입니다........... ㅋㅋ”
“아무튼 당신 가게에 있는 직원들은 살판이 났긴 나겠다...........”
“ㅋㅋ”
“제수씨... 바가지 안 긁어?..........”
“답답하면 자기가 가게 나올 건데... 집에 있는 거 보면 별로 불만이 없는 거겠죠............”
“여하튼 두 사람 모두다 재주는 좋아... 그렇게 해도 가게 끄떡없는 거 보면.........”
“직원들이 열심히 잘 해요...........”
“그려... 그것도 당신 복이다.............”
사실 내 인생에 이 두 명의 후배는 뒤늦게 만난 인연이지만 참 복 받은 만남이다. 별 볼일 없는 존재의 실체를 모두 파악하고
또 정치판과 완전히 이별한 지금까지도 끝없이 나를 걱정해주고 이따금 내가 담뱃값이 떨어졌을까봐 그걸 챙겨주려고 하는
후배들 이런 후배를 가질 수 있음이 내 삶이 복 받은 삶이란 증거이다. 후배들과 통화를 마치고 컴퓨터를 열었다.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은 메일함에 참 많은 메일들이 쌓여있었다. 대통령선거에 패배한 이후 아예 한동안은 모든 일과를 중단한 채
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허망하게 시간을 보낸 증거였다. 메일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늦었지만 답장이 필요한 메일들은
일일이 답장을 하고 또 필요 없는 메일들은 삭제를 해가면서 메일함을 정리해나갔다.
메일 정리를 마치고 SNS계정들 역시 챙기기 시작했다. 격려성 쪽지도 많았지만 실제 대통령후보 캠프도 아닌 우리에게
퍼붓는 욕들도 만만찮게 많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청년유권자들을 탓할 수 있는 그런 선거도 아니었다. 76%에 육박하는
투표율은 그동안 젊은 청년들의 투표참여율이 낮아서 선거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우리당의 그 변명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고 투표일 직전 대통령후보 캠프에서 투표율 70%만 넘기면 압승이 가능하다고 한 후보자 캠프에서의 오만의
결과였으니 말이다.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온라인상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챙기면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오늘따라 전화도 조용했다. 따분한
마음에 스피커 볼륨을 잔뜩 올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냥 노래방에 가면 부를 줄 아는 가사를 외울 수 있는 몇 곡 되지 않는
노래 중 가장 청승맞은 노래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를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목청껏 불렀다.
“와... 박 비서님 노래 잘 부르시네요.........”
“어!... 어서 오세요.............”
난 후다닥 스피커 볼륨을 줄이고 창피함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그 년을 맞았다. 참 황당한 일이다. 수많은
시간 중에 왜 하필 혼자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이 시간에 사무실을 찾은 건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박 비서님하고 점심이나 먹으려고요..............”
“예... 하필이면 왜 저 같은 사람하고요... 이왕이면 멋있고 돈 많은 사내를 찾으셔야죠.............”
“박 비서님이 어때서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얼굴 안 생겼죠... 돈 없죠... 거기다 키 작죠... 그것도 모자라 성질마저 지랄 맞죠......... ㅋㅋ”
“밥 한 끼 먹는데 그런 조건들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예... 그러시다면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ㅎㅎ”
“뭐... 좋아하세요?...........”
“안 먹는 거 빼곤 다 잘 먹습니다.............”
“회 좋아하세요?............”
“예... 잘 먹습니다.............”
결국 사무실 옆의 횟집으로 갔다. 여자 당원과 단 둘이서 밥을 먹기가 조금은 껄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점심을 먹기 위해 멀리
나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에 그냥 그 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하긴 평소에 밥 한 끼 먹기 위해
횟집을 찾을 일은 없었으니 고맙게 먹을 일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와 한동안 떠들다가 그 년은 사무실을 나서고 난 마치지 않은 업무를 정리했다. 그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그렇게 나의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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