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이야기 - 2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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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길과 나는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고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엄마는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고 곽영길 엄마는 엄청
예쁜데 큰 식당을 한다. 곽영길 엄마를 우리 엄마가 언니라고 불렀고 우리 아빠는 누나라고 불렀다. 우리 아빠는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다. 곽영길에게는 아빠가 있기는 있는데 어쩌다 한번씩 아침에 곽영길의 집에 나타나서 곽영길을 데리고 갔다
밤에 데려다 놓고 간다. 이런 날은 곽영길 엄마의 식당에서 나 혼자 논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둘 다 퇴근시간이 고무줄이다. 자주 늦는다.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자주 곽영길 엄마가
하는 식당에서 우리 엄마나 아빠가 데리러 올 때가지 기다려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 식당은 제법 넓고, 방도 많았다. 곽영길
엄마는 빈 방 하나에 우리를 들여보냈고 우리는 그 방에서 같이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디즈니랜드에서 나온 비디오도 봤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한글반, 계산반, 피아노반에 있었다. 어린이 집에서 오후에 읽고 쓰기 계산하기 그리고 피아노도 배웠다.
그런데 곽영길은 태권도반에 있었다. 우리 엄마나 아빠가 같이 연수나 교육에 가든가 집안에 일이 생기면 나는 곽영길의
집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곽영길의 집에는 아예 내 방이 있고 내 옷장과 침대가 있을 정도였다.
우리 아빠는 일 때문에 아침에 들어오는 날도 자주 있다. 한번은 엄마가 아침 일찍 나와 함께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다가
아빠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는 내려오는 중이었다.
"자기가 지금 이 시간에 왜 위에서 내려와?........."
"어?... 우리층 버튼을 깜빡했더니 쭉쭉 올라가버렸어... 그래서 지금 다시 내려오는 거야......"
"이상하다... 우리도 지금까지 밖에 있었는데 왜 자기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지?......."
"여보... 이러다가 늦겠다... 어서 준비해야지... 들어가자.........."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날 곽영길네 집이 갑자기 이사를 가버렸다. 곽영길은 그 날 떠나기 전에 나에게 MP3를 선물로
주었다.
"오빠... 왜 이사가는데?.. 오빠는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면 안돼?... 우리 집에 방 많거든....."
"5학년이나 된 애가 말하는 것 좀 봐... 바보니?.. 우리 엄마가 이사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나는 남자니까 우리 엄마를
지켜야 하잖아?.........."
"그럼... 나는 누가 지켜?..........."
"너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지킬 필요가 없어요... 너도 4년 동안 태권도를 했잖아... 걱정 말고 이 오빠 생각이 나면.. MP3에
들어있는 노래 들어... 우리가 같이 듣던 노래들이야.........."
"나.. 오빠 보고 싶으면 어쩌지?........."
"내가 전화도 하고 놀러도 올께... 너도 나한테 전화 해... 나중에 정리 끝나면 내가 여기 와서 너를 우리 집에 데려갈께......"
그런데 곽영길 엄마가 아기를 임신했다고 한다. 표시가 뚜렷하게 나는 것은 아니지만 잘 보면 배가 보통 때보다는 약간 배가
부르다. 그 날 밤에 우리 엄마와 아빠는 대판 싸웠고 아빠는 엄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여보... 내가 정신 나간 미친놈이야... 다시는 안그럴께............"
"이 나쁜 놈아!.. 이 더러운 놈아!... 수정이만 아니면 당장 이혼이야... 알아?............"
우리도 엄마와 나는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로 이사했고 아파트에서는 아빠 혼자 살았다. 그런데 그 해 연말에 엄마와 나는
다시 아파트로 돌아갔다.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나 혼자 두 집 살림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 차라리 우리가 들어가자...........”
곽영길이나 이모는 전화번호를 바꾼 것 같은데 나에게는 더 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곽영길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엄마에게 그들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나에게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곽영길도 또 이모도 보고 싶은 때가 많다. 내 생각에 엄마는 분명
그들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말해줘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사 가던 날 곽영길은
전라남도 어디라고 했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곳이다. 워낙 심심할 때 나는 딱 한번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곽영길 집에 가서 자고 오면 안돼?........."
"수정아... 좋았던 일은 잊어먹지 않게 기억 속에 잘 간직해............."
평소의 엄마답지 않게 엄마는 이렇게 엉뚱한 소리로 대답했다. 엄마가 웃긴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나는 TV, 컴퓨터, 휴대폰과 친구들을 정리하고 공부에 몰입을 했다는 말이다. 나는 문학 작품들을 읽고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나 세계사를 읽었다. 엄마는 나에게 책을 사다 주면서 읽으라고 했고 가끔씩 나를 불러서 그 책을
펴놓고 책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처음에는 책을 읽기가 짜증났지만 몇 권 읽으니까 심심할 때 시간 보내기에는 참
좋은 것 같다.
엄마는 또 나를 "뉴턴슈타인"이라는 과학 학원에 보내주었다. 거기서 우리는 많은 과학 실험을 하고 영화를 보고 과학을
배웠다. 다른 애들은 몇 달씩 다니다가 그만 두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3년이 넘도록 아주 열심히 다녔다. 이 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과학이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엄마는 과외선생님을 집으로
오게 해서 나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과외선생님은 우리 아빠가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녀를 말렸다.
"수정이 학교 성적은 아빠가 알아서 챙기니까 조금도 신경 쓰지 마세요..... 수정이가 영어로 책 읽고, 말하고, 알아듣고...
또 수학은 하기 싫어하지 않도록 예습 복습만 조금씩 시켜주세요..........."
그런데 그 과외선생님은 최은하 선생님인데 엄청 예쁘고 날씬하다. 피부도 엄청 곱고 반짝거린다. 최은하선생님이 집에 오는
날에 아빠가 집에 있기라도 하면 엄마는 아빠를 아예 집에서 내쫓는다. 최은하선생님은 나랑 마음도 맞고, 말도 잘 통한다.
나는 언니라고 부르면서 그녀를 잘 따랐고 그녀도 나를 친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때
한국으로 이사왔다는데 나랑은 주로 영어로만 얘기했다.
은하 언니는 나를 영어경시대회에 자주 내보냈다. 언젠가부터는 나도 입상권 안에 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은하 언니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라는 곳에 가서 3주 동안 놀다 오기도 했다. 토론토는 온타리오호 연안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고 은하 언니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라고 한다. 이 3주 동안에 우리는 미국에도 자주 갔었다. 토론토에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에도 한번 더 갔다. 이 언니도 내가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왜 내가 전교1등을 하게 되는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른다.
나는 시험에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은 한개도 틀리지 않는다. 다른 것은 날밤 새워서 모조리 외워버리면 틀릴 일이
없다. 그래도 실수가 생겨서 몇개 틀리는 것은 신경 안 쓴다. 숙제나 수행평가도 날밤 새워서 정갈하게 한다. 내가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중3까지 여신이라는 별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내가 한미모를 한다는
사실이다. 중3 담임 선생님은 엄마를 학교로 불러서 나를 과학고에 보내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 때까지 나나 엄마가 전혀
꿈도 안 꾸던 과학고등학교에 지원을 하고 입학시험을 치고 당당하게 합격을 했다. 내 생에 처음으로 입학시험이라는 것을
보고 합격한 것이다.
우리는 학교 기숙사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학기 초에 이 과학고에서도 과연 내가 여신이라는 별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탐색전을 벌였다. 한 바퀴 주욱 둘러보니까 나는 내 미모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였다. 나는 수석 합격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일단 기가 팍 꺾였다. 또 과학고라는 곳은 날고 긴다는 애들이 모여있는 곳이어서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공부하는 양은 가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었다. 숙제라는 것이 새벽 4시나 5시 돼야 끝난다. 그런데 기숙사는 1시만
되면 불을 꺼야만 한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숙제를 화장실에서 해야만 한다. 영어나 수학을 따라가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이었다. 중학교에서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나 한수정은 한다고 했다. 하루에 두 시간만 자고, 점심시간에 점심을 굶고 잠을 자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도 처음
있었던 중간 학력평가에서 나는 전교 2등밖에 하지 못했다. 나는 여신이라는 별명을 반납해야 했다. 전교 수석은 김태현이란
남자애라고 한다. 나는 이를 가는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주일 내내 기숙사에서 살다가 주말이면 집에 온다.
원래는 금요일 저녁에 집에 와야 하지만 과제물을 제출하여야 하기 때문에 나는 밤을 새워서 작업을 한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제출하고 집에 간다. 다른 애들은 금요일에 집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제출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는 못하는
성격이다. 김태현이라는 애도 그런 것 같다.
토요일 아침에 은하언니가 먼저 우리 집에 와서 기다리다가 나에게 수업을 하기로 되어있다. 그런데 내가 잠을 자는 바람에
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가버려야 했다. 나는 집에 도착하면 일요일 밤에 기숙사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논스톱으로 잠만
자다가 간다. 일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독기를 품고 했는데, 1학기 학기말 학력평가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전교 2등이었다. 전교 1등은 여전히 그 김태현이다. 나는 여신이라는 별명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여름방학 때 은하언니랑 또다시 공부를 하지만 2학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학교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태현 저거 완전 괴물이야.........."
"잠자는 것은 전교 1등인데... 어떻게 공부도 전교 1등이냐?........"
"저... 쉬퀴 완전 외계인이라니까............"
나는 하도 궁금해서 2반에 있는 김태현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일은 금방 일어났다. 2반에 있는 내 친구 주영숙에게
내 탭을 빌려주었다가 다시 받았는데 배터리 충전기를 깜빡해서 받으러 가야 했다. 점심 시간에 내가 주영숙을 만나러 2반
교실에 들어갔는데 주영숙이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가 나를 보고 불렀다.
"한수정... 충전기 여기..... 미안해............."
그러자 옆쪽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한수정?..........."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다가 벌떡 깨어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애.
주영숙이 그 남자애한테 웃으며 말했다.
"괴물 외계인!... 너는 잠이나 자........"
"쟤가 외계인이야?......."
"그래... 괴물, 외계인, 독종, 별종... 아직도 김태현을 모르니?.........."
"이름이야.. 알지......."
그때 외계인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한수정 네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나도 한수정 네 이름을 알고 있거든.. 주영숙... 커피 두 잔 대짜로 부탁해......."
"오늘은 대짜 두 잔?... 그럼 만원.............."
어이없는 일은 같은 반 애가 커피 두 잔을 달라고 했는데 주영숙이 만원을 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은
주영숙이 만원을 내라고 했다고 해서 그 외계인은 만원짜리 한 장을 내고 대짜 종이컵에 커피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황당한 일은 그 외계인이 나에게 그 커피 한잔을 나한테 주는 것이다. 내가 그 커피를 받으면서 주영숙을 향해서 한마디
무심코 했다.
"오천원짜리 커피네... 자판기에서는 100원인데........."
"야... 한수정... 이 보온병에 이제 커피 한 방울도 안 남았어... 닥닥 긁어가는데... 난 이제 어쩌라고?... 인스턴트도 아니고
원두커피 두 잔에 만원이면 싸게 주는 거야.............."
외계인은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수정... 미안해... 진심........."
"어?.. 네가?.. 네가 왜 나한테 미안해?............"
"너.. 밤잠 안자고 공부한다는데.........."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를 알고 있다. 자기가 1등을 하는 바람에 내가 2등을 하니까 미안하다는 말이 아닐까? 그게 왜
미안한 일일까? 우리 뒤에서 주영숙과 그 주변에서 킥킥거리면서 한마디씩 한다.
"저 외계인도 예쁜 것은 아는 거야?......."
"와아아... 한수정이 오니까 잠자는 것을 포기하네... 하하하........"
"세상에... 살다 보니까 이런 일도 다 있네... 하하하.........."
"한수정... 너 우리 교실에 매일 올 수 없니?... 하하하................."
그 뒤로 나는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갔다. 내가 갈 때마다 외계인은 나에게 오천원짜리 커피를 권했다. 이렇게 우리는 2년을
보냈다. 외계인과 나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도저히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
한가지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내가 전교 1등을 도저히 해보지 못하고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딱 한 명 그 외계인
김태현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고이므로 고 2가 되자 수능을 앞두고 우리는 수시에 지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생긴다. 이 외계인은 진짜 외계인이 틀림없다. 상위권에 있는 애들은 다들 법대나 의대로 빠진다. 그런데 2년 동안 전교1등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 이 외계인이 지원한 과는 법대도 의대도 아닌 건축과라는 사실이다. 주영숙은 법대와 의대로 썼다.
나도 법대와 의대에 썼다. 그런데 자꾸 외계인이 지원했다는 건축과로 촉이 엄청 쏠린다. 그래서인지 원서 접수 마감일이
되어갈수록 초조해지기도 한다. 나는 외계인을 찾아갔다.
"어느 대에 썼어?......."
"뭐?........"
"어느 대 건축과로 썼냐고.........."
"대한대........."
"나도 거기 쓸껀데... 도와줘........."
"혼자 못해?............"
"지금... 벌써 날짜가 너무.........."
우리 둘이는 전산실로 갔다. 외계인은 주영숙에게서 만원에 두 잔짜리 커피를 가져왔으나 전산실로 갖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음식물 반입은 기기를 보호한다는 것 때문에 금지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밖에서 다 마시고 들어가려고 복도 끝의 창가로
갔다.
"왜 건축과 썼어?......."
"비밀이야... 너는 왜 거기로 쓰는데?........."
"여기서는 내가 2등짜리였거든... 혹시 또 알아?... 거기서는 1등을 하게 될 지.........."
"그럼... 나를 꺾을 목적으로 대학이랑 과를 결정한다고?..........."
"원서 7개 내는데 그 중 하나야... 붙는다고 해도 거기 다닌다는 보장도 없어............"
"나는 원서비가 아까워서 이거 한군데 밖에 안 냈어............."
"지금 도박 해?..............."
"걱정 마... 나는 붙어.........."
"어떻게 자신 해?............"
"난 1등이잖아... 두고 봐... 난 거기도 수석으로 붙을꺼야..........."
"그럼 나는 1등 못하네... 차라리 쓰지 말까?........"
"입학은 여기 성적으로 하니까 네가 나를 꺾을 수는 없어... 나를 꺾는 것은 그 다음 시험부터 가능할거야..........."
수시와 수능 발표가 있었고, 우리 학교 상위권 애들은 대학들이 데려가지 못해서 안달이니까 가산점도 많다. 그래서 원서를
낸 학교에는 거의 다 합격했다. 나도 의대, 법대, 외국어대 등등 7개 대학에 모두 합격했다. 주영숙은 의대로 갔다. 외계인은
딱 한군데 대한대 건축과에만 합격했다. 당연하다. 그는 지원을 거기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거기에 등록한다고 했다.
나도 그를 따라서 그리로 등록했다. 마치 자석에 끌려가듯이. 그가 1등이므로 내가 거기에 가야 2등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1등이므로 내가 거기에 가면 2등이어도 좋다. 그가 1등이고 내가 2등이라는 이 사실은 과거 2년 동안 계속 일어났었다.
여기에 나는 이미 적응해버렸다. 그는 "내꺼 1등"이다. 나 혼자 생각해본다.
내 앞에 그가 없다면 어떨까? 내가 2등인데도 그가 1등이 아니라면 어땠을까? 나는 분명히 2등인데 1등에는 김태현이 아닌
다른 애가 있다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2등 그렇다면 나는 분명 정신줄을 놓고 무슨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자살을 결심하고 또 실행에 옮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2등이어도 좋은 이유는 그가 1등이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똑같은 2등이라도 엄연히 다르다.
졸업식날 나는 졸업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주영숙과 함께 외계인을 우리 집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자리가 항상 그의 뒤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폭발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만의 일방적인 문제인 것 같았다. 외계인에게는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는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는 술에 취해 뻗어버리는 바람에 하나도 기억 못한다. 며칠 뒤에 그날 일들을 주영숙이 나에게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주영숙에게는 한 살 많은 언니 주영심이 있다. 이 주영심 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 외계인 그리고 주영심 언니
이렇게 세 사람은 대한대학교 공대 건축과에서 만난다. 나는 과학고에서는 주영숙과 단짝이었다. 이제는 주영심 언니와 아주
단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 외계인 그리고 주영심 언니 이렇게 우리 셋은 똘똘 뭉친 삼인방이다.
"영숙이 대신 나야?... 하하........"
"언니... 배신자는 처단해야겠죠?... 하하.........."
"외계인 얘기는 영숙이가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줘서 나도 잘 알아........"
"그럼... 다행이네요..............."
외계인은 대학에 왔다고 해서 지구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에서도 그는 여전히 외계인이다. 그런데 외계인 뒤에서
2년을 머뭇거리던 나도 기꺼이 외계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4월 어느 날 밤에 캠퍼스에 벚꽃이 활짝 피어있는
길을 걸으며 그가 갑자기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제 간은 충분히 봤으니까 우리 커플하자........."
"커플?... 무슨 커플?........"
"캠퍼스 커플..........."
"야아아... 그거 하려면 사랑도 해야 하거든?............."
"사랑?... 그거 뭐 어렵나?... 하면 되지........."
"진짜 자신 있어서 하는 소리야?............."
"난 자신 없는 것은 입밖에 꺼내지 않잖아?......."
"그런데 너 사랑 할 줄은 알아?.........."
"아직... 안해봐서 몰라... 해보면 되지 않을까?............."
"참나..............."
그는 그날 내 손가락에 커플링이라며 금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는 나에게도 똑같은 반지를 주고 날더러 자기 손가락에 끼워
달라고 했다. 나중에 그가 말했다.
"커플링을 했으니까 키스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를 안고 키스도 했다. 나는 그 때 그가 내 입술을 빨면서 놓아주지 않을 때 까치발을 디디면서 그의 입술을 같이
빨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기도 했다.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 나는 그에게 놓아
달라고 했다.
"하아... 이제 고만하자... 하아아... 숨막혀 죽을 것 같아.........."
"키스하다 죽는 사람도 있나?... 하하........."
대학에 와서 그에게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그가 잠자는 것을 많이 줄인 것 같다.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많이 힘들다고는
하는데 과학고에서 하던 것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학교 실습실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일들이 많이
생겼다. 우리는 그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쉬는 시간을 만들어서 밖에 나가서 키스했다. 그러다가 주영심 언니에게 걸린
적도 있다.
"요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쏠로는 어쩌라고?.........."
"헤헤... 언니... 쏘리.............."
이렇게 이런 저런 일들을 만들면서 우리는 대학에 다녔다. 2학년 때 우리는 CAD 자격증을 따야 한다. 그 때는 전산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밤샘하는 것은 거의 매일 정해져 있다. 또 전산실에서는 컴퓨터에서 빈 자리를 차지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김태현은 몇 번 이런 일을 겪다가 하루는 노트북을 들고 왔다. 우리는 전산실로 가지 않고 설계실로 갔다. 그가 노트북을 켜고
부팅하면서 말했다.
"이 노트북은 CAD가 된다면서 사양이 엄청 빡씨더라........."
"그러네... 이 정도면 엄청 비싸겠는데?.........."
"3년간 원리금 균등 분할 상환으로 엄마한테 대출받았어.........."
"그 돈으로 일반 노트북 여섯 대 정도는 충분히 사겠네..........."
"나중에 여기 고정석이 생기면 데스크탑도 갖다 놓을꺼야........"
"돈 많다고 돈지랄하니?......."
"그게 아니라... 할일 없이 기다리는 시간 때문에..........."
"너는 컴퓨터보다는 카탈록에 훨씬 더 많이 집중하잖아?.............."
"내 걱정은 안 해... 수정이 네가 그런 것을 못하니까 문제지................."
그럼 그가 이런 노트북을 가져온 것이 나 때문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CAD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그가
강의실, 식당, 화장실에만 가고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72시간을 노트북과 함께 사는 것을 그의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것도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려니까 나도 따라서 그렇게 하게 된다. 과학고 때 애들이 그에게 왜
괴물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는 명령어에 일일이 변수를 대입하면서 실행시키고 그 결과를 보면서 그 명령어를 하나씩 익혀나간다. 그런데 그는 먼저
명령어 카탈록을 읽고 머리 속으로 스캔을 한다. 그리고 혼자 해버린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하기 때문에 컴퓨터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는 카탈록을 머리 속으로 스캔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리에게는 외계인과 지구인이라는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건도 그가 내 앞에 1등이고 내가 그의 뒤에서 2등이라는 사실에 내가 불만을 갖지 않고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이 왔다. 2주 동안이다. 그런데 첫째 주말에 아직 시험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 그가 나를 불렀다.
우리는 강남 청담동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와인을 마셨다. 나는 시험 공부를 해야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먹고 마시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볼멘 소리를 했다.
"야아... 너는 시험공부 안 해도 되지만... 나는 벼락공부를 해야 하거든......."
"알아... 쉬면서 해.........."
다음주 금요일에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 그는 또 나를 데리고 강남으로 갔다. 이번에는 양식이다. 스테이크를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이제 방학이네... 뭐할꺼야?........."
"집이 부산 해운대로 이사했거든... 부산에 가서 있어야 해... 너는 뭐해?........."
"나는 당장 과외 시작해야지... 이제 가진 돈이 거의 떨어져 가거든.........."
"나중에 꼭 놀러 와야 해... 해운대라서 바닷가이고 경치도 엄청 좋대........."
그는 서울에서 과외해서 돈을 벌고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가 가기 전에 그러니까 유난히 추운
겨울날 김태현은 KTX를 타고 부산에 왔다. 나는 엄마 차를 타고 부산 역에 가서 그를 데리고 해운대로 왔다. 우리는 조선비치
호텔 뒤에 있는 백사장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몸을 얼렸다. 나는 그를 해운대 달맞이길로 데리고 갔다. 곳곳에서 사진도
찍고 깔깔거리며 걸었다. 이렇게 오후를 보내고 우리는 언덕 위에 있는 식당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점심겸 저녁을 먹었다.
"오늘 부산에서 자고 내일 올라가........"
나는 그를 데리고 나가서 남포동과 자갈치를 구경시켜주었다. 밤에는 송도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를 그 곳에 있는 모텔에서
혼자 하루 밤을 자게 했다. 다음날 나는 그가 자고 있는 모텔에 가서 그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는 겨울 바람이 유난히 센
태종대를 걸어서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는 밤에 KTX 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과외를 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과외 대신에 군에 입대를 해버린 것이다.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나 뿐 아니라 그가 군에
가는 것을 우리 과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나도 열을 받을 만큼 받았다. 군에 입대하는 것은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나한테 그가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려면 뭐하러 커플을 하지? 나는 이번에 저 외계인의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치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은하언니를
만나서 휴학하고 외국으로 유학가겠다고 말했다. 은하언니는 나에게 토론토 대학을 권했다. 언니는 이 학교가 역사도 전통도
빵빵하고 세계 대학 랭킹에서 10번째 안에 드는 학교라면서 나에게 토론토 대학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바로 입학허가서를
신청했다. 나는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5월 초에 그가 휴가라는 것을 나왔다. 나는 그 사실도 주영심 언니를 통해서
들었다. 언니도 복잡한 경로를 통해서 알았다면서 나한테 말해주었다. 나는 밤 늦게 그를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럴꺼야?........."
"미안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정이가 나를 보고 싶어 할까봐.........."
"거짓말...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면... 너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겠다고?........."
"그러지 마... 말을 중구난방으로 섞어버리는 것을 보니까 많이 흥분한 것 같다..........."
"맞아... 우리 사귀고 또 사랑하는 사이거든... 그런데 나는 네가 군에 가는 것도... 휴가 나오는 것도 몰라.....이걸 뭐라고
설명할래?........."
"기다리지 말고.. 보고 싶어 하지 말고.. 그리워 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고 이 기간을 보내자........"
"그럼?......."
"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 때가서 다시 얘기해보자.........."
"너는 너 위주로만 생각하니?.. 나.. 몇 일 있으면 캐나다에 가... 벌써 휴학계도 냈어........."
"으음........."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뭐 씹은 표정이야?........"
"나는 군에 있으니까 시간이 지겹지 않아... 나는 밖에 있는 네가 지겨울까봐 그런건데.........."
"또 나를 위해서라고?.. 내가 느끼는 이 배신감이 진짜 나를 위해서라고?... 네가 내 가슴에 박아놓은 이 대못이 나를 위해서
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나가는 개랑 고양이랑 전부 다 웃는다........."
"내 생각이 맞을꺼야......."
"오늘이 화요일이지?... 금요일에 출국이야... 우리 목요일 저녁에 만나........."
나는 그에게 이 말을 하고 우리는 그날 밤에 헤어졌다. 사실 나에게 걱정되는 일이 딱 한가지가 있기는 있다. 우리 과에
제대한 복학생 중에 별명이 왕꼴통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생기기도 멀쩡하고 미끈한 제비처럼 잘빠졌다. 이 남자는 지난
가을 학기에 복학하는데 1학년 때 배운 일반물리학 펑크로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가 나에게 접근해서 온갖 친절을 베풀더니
비밀로 해달라면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을 나에게 물어보겠다면서 일주일에
한두번을 만나달라는 것이다.
이 왕 꼴통은 참 친절하고 여자를 녹이는 재주가 있기는 있다. 나도 아차 하면 넘어갈 뻔 했으니까. 과 선배인 그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결국 손을 들었다. 그는 그의 별명처럼 꼴통이었다.
기도 안찰 일은 그가 헛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이다. 자기가 나랑 어디를 갔다는 둥 무슨 일을 벌였다는 둥 이 말을 들은
주영심 언니가 나에게 와서 그 말을 전해주어서 나도 알았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코웃음을 치고 넘겼다. 찾아가서
따진다는 것 자체가 수치다. 그는 아예 꼴을 보기가 싫다. 그런데 주영심 언니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태현이가 알면... 그 소심한 성격에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크겠어?........"
"에이... 언니도... 우리가 하루 이틀 알고 지내는 것도 아닌데... 설마............"
그는 나에게 이 일을 묻지 않았고, 나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서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떠나기 전에 나에게 이
사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혹시... 이 외계인이 내가 왕꼴통과 잠자리를 가진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에는 보편 타당성이 빠져있는 상황이라서 나는 그렇게 단정을 지어버렸다. 그리고 목요일 밤에 그를
만났다. 우리는 저녁을 먹었고, 술을 가볍게 마시고 나는 그를 모텔로 데려갔다.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나는 공갈과
협박까지 하면서 그와 침대에 갔다. 남자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 처음인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 그는 마지막에
나에게 가임기냐고 물었다.
"그래... 나.. 결심했어... 나.. 우리 아기를 가질꺼야... 내 안에 깊숙하게 사정해........."
"야아... 애기가 어떻게 애기를 키우니?... 두 애기 다 고생이야... 말도 안돼................."
그는 튕기듯 떨어져 나가더니 콘돔을 하고 다시 들어왔다. 나는 그 콘돔을 벗겨낼 생각으로 그가 왕복운동을 하는 동안에
그를 사정없이 꼭꼭 물듯이 조였다. 그는 사정을 하고 빼냈다. 그의 남성에는 있어야 할 콘돔이 없었다. 그 때 그의 절망적인
표정이란 말할수없었다. 그런데 유감인 것은 그 때가 나의 가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그날 밤에 단지 그에게 나의 혈흔을 보이는 것으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헛소문이었음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끝나고 나서 나는 몸을 옆으로 굴려서 침대 씨트에 묻어있는 크고 작은 흔적이 그에게 뚜렷이 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처음에는 그냥 눈물만 흘렸지만 나중에는 소리까지 내서 울었다. 그가 말했다.
"이러언.........."
"이제 알겠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PMP 에 저장되어있는 Kevin Kern 의 Return To Love 를 찾아서 재생버튼을 눌렀다.
이 곡에는 우리 두 사람만의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나 한수정이 김태현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항상 이 곡이 끝나면
그는 나에게 사과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는 땀으로 미끌거리는 그의 알몸을 안고 쓰다듬으며 그에게 말했다.
"김태현... 너는 군으로.. 나는 캐나다 유학으로...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잠시 헤어질 뿐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나는 결코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수정아............"
곡이 끝났어도 그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의 고집이 또 시작된 것이다.
캐나다에 도착한 나는 그가 제대하고 복학할 때 나도 귀국할 수 있도록 공부에만 집중을 했다. 주말에 미국에 놀러 가는 일도
한 달에 한번 정도만 했다. 방학이라고 해서 한국에 온 적도 없다.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아주 살다시피 했다. 북쪽으로 1000
킬로미터쯤 가면 오로라를 볼 수 있다. 나는 아직까지 그 오로라도 보지 못했다. 그가 제대하고 나서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면
안 된다는 한가지 생각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나는 주영심 언니로부터 이메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듣고 있었다. 김태현이 제대해서 학교에 나타났고
신촌에 있는 와인 바에서 일하는 알바생과 사이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그가 윤기숙과 커플링을 하고 있고 윤기숙도
퀸에 뽑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가 알바로 여고생에게 과외를 하는 것 같은데 그 여고생이 약간 당돌해
보인다는 제보도 있다. 주영심 언니가 알고 있는 것이 이 정도면 모르는 것은 없을까? 그러니까 이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나는 김태현과도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 그런데 알맹이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우리는 그도 나도 서로 인사를 전하는 짧은
내용만을 주고 받을 뿐이다. 졸업을 앞둔 나는 졸업과제로 프로젝트를 해온 것이 있다. 그것은 "장애인 복합단지"이다. 그
내용은 산과 강 그리고 농경지가 어우러진 자연환경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주거, 문화, 교육, 스포츠, 레저, 에너지 공급까지를
포함한 콤플렉스이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가 예상 외로 잘 나왔고 또 캐나다 건축학회 학술집과 국제 건축 학술지에도
이미 소개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 중에 하나는 바로 시대를 역행하는 "역발상"이다. 나는 자동화 시설을 매우 조금만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시설에는 항상 고장의 위험을 피할 수가 없고 그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장애인들은 일반인들보다 피해가 더욱더 크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나의 이런 생각은 "역발상"이라면서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다. 지난 주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국제 건축 학회의 컨퍼런스가 열렸었고 나는 거기서 아직 대학 재학생의 신분으로 내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이것은 캐나다
건축학회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내가 최연소 발표자라고 한다.
나는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 가기로 했다. 처음 출국한 후에 아직까지 보지 못한 엄마와 아빠를 만나는 것도 내게는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김태현으로부터 그날 밤에 받지 못한 사과를 이번에는 무슨 수를 쓰든지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짐을 찾아서 입국 게이트를 향해서 가고 있다. 그런데 이 길이
왜 이리도 멀은지 또 가슴은 왜 이렇게 요란하게 뛰는지 한참을 걸어가니까 저기 앞에 대합실로 나가는 자동문이 보인다.
저 문 뒤에는 지금 주영심 언니가 김태현과 같이 나와 있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여러 번 깊이 했다. 그리고 자동문을 향해
가까이 가면서 마음 속으로 외쳤다.
"열려라 참깨!.............."
주영심은 윤기숙에게서 나는 지혜로부터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커피를 마시느라고 우리 네 사람은 한동안 조용하다. 커피가
들어가니까 들떠있던 나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조용하니까 나는 더 긴장된다. 모든 기다림이 이렇게 초조하지는 않으리라. 나는 주영심에게 물었다.
"오늘 수정이네 집에서는 아무도 못 나오시나?......"
"부산에서 오시기가 쉽지 않은가봐... 수정이가 내려가겠지... 그렇게까지 시간이 날 지는 모르지만........."
"얘는 지금 무슨 일 때문에 오는데?.........."
"그건 나한테 묻지 말고 이따가 수정이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겠구만............"
"야아... 갈비찜 먹으면서 공항에서 가르쳐주겠다고 했잖아?.........."
"궁금하면 100원!... 히히........."
일본에서 오는 것이라면 김해공항으로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수정이 집으로 가려면 인천공항보다는 김해공항이 훨씬
유리하다. 집에 갔다가 열차나 비행기로 서울로 올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인천공항으로 올까? 주영심은 뭔가를 알고는
있지만 입을 열지 않으려는 심뽀다. 우리가 있는 곳과 나오는 문 사이에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저들도 모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 중에는 웃고 이야기하면서 기다림을 즐기는 사람도 눈에 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기다림도 엄연히 삶의 한 부분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 기다림에 적응하지 못했다. 2년이 넘는 군복무 기간
동안에 제대 날짜를 기다린 것은 내 생애 최고의 인내와 기다림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하고 난 지금이
오히려 입대하기 전보다도 기다림을 더욱 못견뎌 하는 것 같다. 한수정도 나와의 만남을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릴까? 드디어
사람들이 나온다. 기다리던 사람들에게서 그토록 지루하던 기다림이 끝나고 곳곳에서 만남이 시작되었다. 여지 저기에서
탄식과 환호가 터져 나온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다가 커피를 마시며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는 드디어 한수정이 걸어 나온다. 나는 한수정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 밝은 갈색의 야구 모자 앞쪽에는 큼직한
노란 에스(S)자가 빛나고 있다. 흰색 바탕에 TOMORROW 라고 새겨진 기다란 티셔츠는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온다. 초록색
반바지는 티셔츠에 가려서 아주 조금씩만 보인다. 하얀 다리, 그리고 하얀 운동화 한 손으로는 분홍색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은 어깨에 멘 가방 끈을 잡고 있다.
한수정은 3년전의 대한대 공대 퀸이다. 대한대 퀸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 때도 2등은 했었다. 어린 소녀시절부터 나와 4년
가까운 시간을 같이 보낸 한수정이다. 그 후 2년이 넘는 공백기간을 거치고 난 지금은 어엿한 여인으로 성숙해있다.
한수정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벌렁거리고 혼란스러웠던 내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리워하지 말자고 또 기다리지
말자고 했는데 한수정은 과연 그렇게 했을까? 나와 한수정 사이에서 그 동안 정지해 있었던 시간이 이제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다. 한수정은 우리가 있는 쪽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주영심이 한수정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흔든다.
"야!... 한수정!.. 여기야!.........."
그제서야 한수정이 우리에게로 걸어온다. 주영심도 한수정에게로 간다. 너무 당당한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또각 또각.
한수정의 발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서 내 머리까지 울린다. 온 몸의 피가 머리로 쏠린다. 한수정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쪽으로
가까이 올수록 내 가슴이 또 두근거린다. 입술이 마르고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펴기를 계속 반복한다. 지혜와
윤기숙이 나에게 무슨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또 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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