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이야기 - 71편 > 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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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아르바이트 이야기 - 7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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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9가이드
댓글 0건 조회 28,532회 작성일 23-04-17 18:50

본문

아이린은 PC방에 정리할 것이 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아이린은 윤미진에게 오늘 저녁에 애들 수송 문제를 일임
해둔다. 윤미진은 알았다고 하면서 애들을 데리고 나갔다. 아이린도 뒤따라 나갔다.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지고 나에게는 할
일이 없어졌다. 잠도 충분히 잤기 때문인지 몸도 정신도 제법 말짱해졌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마시며 이메일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읽지 않은 메일들의 발신인 중에서 한수정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나는 더블클릭으로 편지를 열었다.
 

To 사랑하는 태현 


날이 추워졌다. 짧은 가을이 스치듯 지나가고 긴 겨울이 오겠지. 나에게 겨울은 몸도, 마음도, 정신도 또 그리고 영혼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추웠어.. 이번 겨울이라고 뭐가 다를까? 
은희 언니나 기숙이 또 영심이 언니를 통해서 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은 듣고 있다.. 회사와 과외라는 짐을 양쪽 어깨에 하나씩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니 다행이야...
 

어쩌면 이번 성탄절에는 토론토가 아닌 서울에서 태현이와 함께 크리스마스 촛불을 밝힐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양초를
태우는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태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속삭여주고 싶다.. 일단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남은 시간 석달 정도를 빡씨게 할꺼야.. 신의 은총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이 계획이 거품이 되지는 않겠지...
 

태현아... 

떠나온 내가 남아있는 너를 훨씬 더 자주 간절하게 생각하고.. 엄청 절실하게 사랑해... 너를 향한 나의 이 사랑이 어서 빨리
너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토론토에서 출발해서 북미의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고 또 태평양까지 건너야 너에게 도착
하겠지... 
이 길은 멀어도 너무 먼 길이야...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절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내 길을 갈 것임을 알아줘.....
 

이 길의 저쪽 끝에 네가 있다는 사실이 내 유일한 희망이야.. 너라는 이 희망 때문에 나는 여기서 하루하루를 살아서 숨쉬고..
생각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너에게 고마워한다... 나에게 태현이가 있어서 정말 고마워... 오늘도 집 앞에 있는 공원에
서서 한숨과 눈물 대신에... 사랑하는 너를 생각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심정으로 해가 지고 있는 서울 쪽으로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From 사랑과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살고있는 수정.....
 

한수정이 적은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길바닥으로 떨어져서 뒹굴고 있는 빛 바랜 낙엽처럼 내 마음속을 이리저리 뒹굴다가
내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아주 소복하게 쌓인다. 이 낙엽더미를 이루고 있는 낙엽 하나하나가 한수정의 말이고 내 눈물샘을
여지없이 터뜨린다. 
나도 한수정에게 답장을 쓴다.
 

To 수정 


지난 이른 봄의 어느 날.. 잎은 삭막한 나뭇가지에서 잎눈으로 생겨났겠지.. 잎은 나무와 함께 이 해의 봄과 여름 하루하루를
살았겠지.. 
잎과 나무는 이제 가을을 맞이한다.. 가을이 되자 잎은 나무에게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면서 자신이 입고있는
옷의 색깔을 바꾼다.. 
이것은 잎이 나무에게 하는 작별의 표시가 아닐까?...
 

자신이 붙어있던 나무에게는 한겨울 잘 보내고 살아 남으라고.. 또 내년 봄에 다른 잎이 되어 다시 찾아오겠다는.. 이 말을
남기고 잎은 나무와 이별을 한다. 
차디찬 길바닥으로 떨어진 잎은 자람에 뒹굴다가 어느 날 길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빗자루질에 쓸려간다...
 

잎은 뜨거운 화로에서 자신을 불태우고 연기가 되어 하늘로.. 또 재가 되어 땅으로 흩어지리라.. 잎은 이렇게 죽어가지만..
이것은 영원한 이별을 말하는 죽음이 아니다.. 
나무는 그 자리에 혼자 남아서 추운 겨울 하루하루를 모두 굳건히 버티고 봄을
기다릴 것이다.. 
겨울 내내 봄이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또 봄이 오는 냄새가 나기 시작할 그 날을 하루하루 가슴 조이며
애타게 기다리리라.......
 

기다림의 마지막에 온 이른 봄날.. 그 나무 어딘가에 잎눈이 피고... 그 날부터 나무에게는 가슴 설레이는 날이 시작되겠지..
그 잎은 다시 그 나무에게로 잎눈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 잎눈이 잎으로 피어나는 그 날.. 잎은 나무와 함께 또 한 해를
살아갈 생각에 뿌듯해하겠지..........
 

수정아... 

수정이 없이 혼자 서울에 남아있는 나 김태현은 나무야.. 떠나고 다시 만나는 것을 우리가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해져야겠지.. 
수정이가 잎으로 나에게 다시 돌아올 그 날을 하루하루 기다릴께........
 

From 너의 겨울나무 태현...
 

어느새 나의 두 눈이 아주 뜨겁게 젖어있다. 나는 전송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나는 창가에 서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쪽 끝 어딘가에 토론토가 있고 그 도시 어딘가에 한수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휴대
전화기에서 최은희의 전화 번호를 띄워 올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 오늘 일찍 끝나서 집에 와서 쉬고 있어... 그런데 서전무한테 들었는데, 자기가 그룹의 회장 된다며?... 너무 신기해.....”
“회장 이름만 다는 거지 진짜 회장은 아니거든요........”

“지금 시간 되면 빨리 와... 같이 저녁 먹자...........”

나는 택시로 최은희의 오피스텔로 갔다. 최은희는 이미 도로에 내려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택시에서 내리자 최은희는
바로 나에게 안겨온다. 
내게 안긴 최은희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이 향긋한 냄새는 상큼한 초가을 저녁에 꽃집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 꽃집 안에 있는 모든 꽃들이 한꺼번에 뿜어내는 모든 향기들이 한데 어우러진 냄새이다. 최은희라는 한 여인의
몸과 마음 그리고 향기와 아름다움까지 이 모든 것들이 성숙이라는 과일 속에서 한데 어우러진 채로 가을 햇살에 익어가며
스며나오는 과일향 에틸렌 같기도 하다. 빛 바랜 나뭇잎들이 떨어져 쌓인 낙엽 더미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냄새이다.
 

"왜... 밖에 나와서 기다려요?......" 

"자기가 온다고 생각하니까 방안에 갖혀 있는 내 가슴이 너무 답답했어........."

"누나는 이제 어른이야... 그런데 하는 짓은 꼭 어린애처럼 왜 그래요?........"

"구박 고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최은희는 앞장서서 걷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른다. 최은희는 하루 종일 집 안에 답답하게 갇혀있다가 밖으로 나온 강아지
같다. 그녀의 아주 경쾌한 걸음걸이에 맞춰 짧은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에서 찰랑거린다. 나는 최은희의 뒤태를 보면서 5월의
봄날에 하늘거리는 날갯짓으로 꽃을 찾는 한 마리의 나비를 연상하기도 한다. 최은희는 마치 흐르는 물 위를 떠가는 꽃잎이
바위에 부딪칠 듯 말 듯 하늘거리며 흘러가는 것 같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최은희는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자기 배고파?... 걸을 힘이 없는 거야?........"

"아니야... 나는 아까 저녁 먹었어... 뒤에서 누나가 걷는 것을 보니까... 밖이 엄청 좋은가?........"

"밖이 좋은 것 보다는 자기랑 걸으니까 좋은 거지... 자기는 안 그래?......."

"나도 좋아... 이렇게 좋아하는 누나를 보니까 나도 엄청 좋아............"

나는 최은희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가을 저녁을 즐기며 한참을 걸었다. 식당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내 배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최은희가 깜짝 놀란다.


"세상에...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어?... 저녁 먹은 지 얼마 안되거든요... 그렇게 고픈 편은 아닌데?......."

"거짓말을 왜 해?... 자기 배는 다르게 말하잖아... 하하......."
 

길 모퉁이에 기사식당이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띈다. 최은희가 앞장서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식당의 종업원은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매운 양념으로 절여서 볶은 요리를 추천했다. 우리는 그 음식을 주문했다.
 

"회장님이 되신 것 맞아?... 하하......." 

"회장은 무슨 회장?... 그냥 빈 자리를 채우는 정도야.........."

"그래?... 서전무 생각은 다르던데?......."

"뭐라고 했어요?............"
"나중에 자기가 캐나다에 가서 공부하도록 날더러 잘 구슬러달래... 거기 지사를 자기한테 맡기고 싶어하는 눈치 같아......"
"그런 말을 했어?......." 

"자기 딸 지혜도 거기 데려다가 공부시키면 어떻겠느냐고 하던데?......."

"지혜는 영어 때문에 쉽지 않을꺼야........." 

"그 쪽에도 외국인 학생들이 공부 시작하기 전에 미리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 있거든요........"


"조용하게 공부하는 지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그러지 말고... 그 쪽 지사는 차라리 누나가 맡아서 하겠다고
 얘기하세요......."


"여보세요... 나는 지금 맥꼴은행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근무하거든요............"
 

우리 식탁으로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상추쌈에 고기를 싸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면서 아주 열심히 먹었다. 고기는 엄청 매운
맛이지만 약간은 고소한 맛도 나면서 맛있다. 우리는 또 곁들여서 소주도 마셨다. 최은희의 얼굴에 홍조가 돋는다.
내 전화기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주은혜이다.
 

"급한 일인데 통화 돼요?........."
 

나는 최은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여주며 양해를 구하고 주은혜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 나야... 무슨 일인데요?......."

"내일 아침 10시에 장례식이라며?......"

"그래... 맞아요........"
 

"우리는 오늘 저녁에 매장으로 옮기는 일을 끝낼꺼야...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판매를 시작할 수 있거든... 장례식 끝나고
 시작할까?... 아니면 그냥 우리끼리 해?... 
어차피 내일 하루는 주말을 위해서 전시하는 날 것 같은데..........."
 

"장례식은 신경 쓰지 마시고... 매장 오픈 할 때 시판을 시작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한상무님은 뭐라고 하셔요?......."
"아직 뵙지도 못했어... 나도 공장에서 지금 막 나오는 길이야........." 

"나는 내일 장례식 끝나고 출근할께요......."

"오케이... 그럼 내일 봐............"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최은희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 앞에 나란히 섰다. 그녀가 나에게 칫솔을
내 주어서 우리는 같이 양치를 했다. 
최은희는 홈웨어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나왔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서 소파로 들고 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수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백인들은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에 쩔어있어... 그래서 우리 같은 동양에서 온 외국인들을 대놓고
 그냥 무시해.........."


"인종차별?... 누나도 그거 당했어?............."


"어렸을 때 부터 그런 문제는 크든 작든 항상 있거든... 내가 박사과정 할 때 어떤 교수는 아예 대놓고 그랬어... 한국인은
 원래 경영학을 모르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는 나한테 B 이상은 주지 않겠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교수한테 당신 수업 듣지 않겠으며... 당신이 한 말을 SNS에 그대로 올리겠다고 했어... 그리고 그 날 바로 그대로 했지...
 그 학기 말까지 그 교수는 인종차별이라는 논란에 휩싸이다가 결국 그 대학에서 쫓겨났어..............."
 

"하하하... 그 인간은 누나한테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지금까지 그에게 당한 사람들이 하나 둘 이었겠어?...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니까 제가 잘난 줄 알았나봐... 난 인종차별이나
 그런 것 보면 용서 못해.........."
 

"누나가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을 많이 겪었겠구나........" 

"오죽했으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부에 이를 갈았을까............"

"그런데 수정이는 어떨까?..............."

"수정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수정이처럼 실력있는 외국인을 보면 걔네들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거든..........."
"그래도 잘 해야 할텐데.........."

"걔는 실력도 좋지만.. 인기도 엄청 좋아.. 수정이가 동양인 중에서는 영어도 엄청 잘하고, 무엇보다도 미모가 워낙 되잖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수정이는 백인들이 뻑가는 마스크야... 그래서 수정이 주변에는 남자들도 엄청 많아... 수정이가 성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보수적이라는 것을 자기는 다행으로 알아야 해... 
안그랬더라면 벌써 남자 여럿 갈아 치웠을껄... 하하............"

"누나도 보수적이야?......." 


"나는 그런 것 전혀 없어... 인종차별에서 밀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실력밖에 없거든요...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다
 보니까... 그런 쪽으로는 전혀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뿐이야............."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면서 보니까 섹스보다 엄청 중요하고 심각한 것들이 있더라고... 그런 것들에
 매달리다가 오늘에 온 거지... 
그런다고 인생이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최은희의 얼굴이 창 쪽으로 향한다. 그녀는 어두운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다. 최은희는 아주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
존경스럽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너무 예뻐서 나는 그녀를 천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생각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최은희는
그 때 그 선생님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가끔 그 선생님과 마주치면 나는 얼른 그녀에게 인사를 했고 그녀는 나에게 공부를 잘한다며 창찬하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나에게 그렇게 좋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그 선생님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내 눈에 보이는 최은희는 고독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금 마치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다. 그것도 잎사귀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가지만 앙상한 겨울 나무. 그녀만의 외로움이 그녀의 그림자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저 여인의 심연에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고독이라는 덩어리이리다. 어쩌면 저 고독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인생을 이토록 고집스럽게 살도록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은희의 어깨로 팔을 둘렀다. 그제서야 최은희는 고개를 숙이며 어깨 저쪽에서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최은희의 어깨를
내 쪽으로 당겼다. 최은희가 내게로 힘없이 쓰러져온다. 최은희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나는 얼굴을 그녀의 머리로 내렸다.
내 코로 그녀의 머리를 문지르다시피 했다. 원피스의 앞섶이 벌어지면서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뽀얀 탱탱한 살덩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한 개는 짙은 꼭지까지 얼핏 보인다.
 

내가 숨쉬는 것이 불규칙해진다.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점점 빨라진다. 이것은 여자의 가슴을 보았다고 해서 흥분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에게 안기다시피 하고 있는 최은희라는 여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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