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천사 -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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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그 길을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과거처럼 좁은 시골길이 아니긴 하지만 여전히 강원도의 시골
풍경을 담고 있는 그 길이 얼마나 좋은지.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팔걸이에 손을 올려 놓고 주변을 살펴보는 여자의
얼굴도 풍경에 집중한다. 허리에서 사라진 여자의 손길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서 더 편안하게 라이딩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우린 바람을 맞으며 심장을 두둘기는 애마의 소리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어느새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다다랐다.
“어디로 갈까요?.............................”
선택의 기회는 늘 우리 앞에 있고, 그 짧은 선택의 시간이 우리의 미래를 갈라 놓곤 한다. 지금 우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니 이 여자의 선택은?
“어디가 좋은데요?...................................”
“왼쪽은 진부령이고 바로 가면 미시령이에요... 미시령은 예전 길이 험해서 새 길을 놨죠... 덕분에 예전 같은 스릴은 없어요...
진부령은 고성으로 가기 때문에 길을 좀 많이 돌아야 하죠.............................”
“그럼... 답 나왔군요... 미시령으로 가요................................”
“그럴까요?.....................................”
“네... 새길 말고 옛길루요.......................................”
여자를 돌아봤다. 그 옛길을 내려가자면 혼자서도 등골이 오싹할 판에 여자를 태우고 가자고?
“안전을 보장 못합니다.....................................”
“그렇게... 위험해요?.....................................”
“둘이서라면 더 위험하죠.........................................”
“그럼 더 좋아요.... 우리 모험 한 번 즐겨봐요...........................”
“그러다 사고 나면 책임지시게요?..................................”
“못할 것도 없죠.......................................”
“하하하.................................................”
어이없는 내 웃음에 여자가 빙그레 웃는다.
“죽는 게 두려우세요?....................................”
그 시간 이후 나는 때로 생각했다. 죽는 게 정말 두려운 걸까? 아니면 죽음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걸까? 가파르고
굴곡지고 앞 뒤에 붙은 차로 인해 끊임없이 느껴지는 위협 속에서 나는 진땀을 흘렸지만 내 뒤에 앉은 여자는 스스럼 없이
내 허리를 꼭 잡고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오래 전 들었던 어떤 노래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난 이내 그 노래에 대한 생각을 잊어야 했다. 거칠게 휘돌아가는 비탈진 S자의 커브를 멋지게 돌고
싶었으니까.
“저녁 먹기 전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시령을 내려오던 어떤 시간부터 여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내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여자와 나는 그저 잠시 한 때 길이 같은 동행에 불과했다.
“제가... 아는 곳이 있는 데 그곳이 어떨까요?.....................................”
“어딘데요?....................................”
“영랑호 리조트요...........................................”
예전 대학시절에 가 본적이 있는 곳이었다. 시설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골프장과 넓은 영랑호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설악산의 풍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좋은 곳이었단 기억이 났다.
“그러죠................................................”
곧 바로 영랑호 리조트에 도착해서 나는 방을 얻기 위해 프론트로 가서는 여자에게 말했다.
“어떤 방이 좋으세요?...........................................”
창 밖을 바라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방을 따로 잡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여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머리로 머뭇거릴 때 여자가 다가와 프론트
직원에게 말했다.
“15층 정문을 바라보는 쪽으로 방이 있나요?.................................”
“잠심만요... 네... 있습니다... 이 방은 온돌방입니다..................................”
“그 방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계산할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에요... 운전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그 정도는 보답을 해야죠... 대신 저녁 사주실래요?..........................”
“아... 네... 물론............................................”
그렇게 방을 얻어 키를 받아 들고는 여자가 앞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때까지도 나는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먼저 탄 그녀가 스위치를 누른 채 나를 불렀다.
“뭐하세요?... 안 올라가세요?..........................................”
“네?... 네.................................................”
나는 왠지 주도권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대부분 상담자와의 이야기에 있어서 이야기는 주로 상담자가 했지만 이야기의
방향은 내가 주도했었는데 지금 나는 이야기도 그 방향도 모두 빼앗긴 느낌이었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를 따라서
쭈뼛거리며 들어선 내가 처음 본 것은 거실 창 앞에 서서 저 먼 곳을 바라다보는 그녀의 뒤 모습이었다. 석상처럼 굳어진
모습으로 그 높은 자리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 보던 그녀의 그 모습은 마치 오래 된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 어때요?........................................”
여자의 말에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좋은데요.................................”
속초에 오면 중앙시장 한 쪽에 자리한 88순대국밥집을 찾곤 했었는데, 오늘 그녀의 안내로 온 곳은 아바이 마을을 건너갈
수 있는 갯배를 타는 곳 앞에 있는 88생선구이집이었다. 우연치 않게 일치하는 88이란 단어가 서울올림픽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구식이었지만 그래도 연탄에 구워주는 생선구이가 일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식당이지만 포구 옆
허름한 식당이란 것이 더욱 친근감을 줬다.
“제법 유명한 곳이에요... 다른 생선구이집보다 질이나 양이 더 좋죠... 다른 곳은 이 메로라는 생선은 잘 안주거든요........”
식사 후 우린 갯배를 타고 건너편을 건너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를 촬영했다던 해변을 걸었다. 남들이 보면 조금 어울리지 않는
연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택시를 타고 나온 터라 재킷을 벗은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에 스키니 진이 아주 멋스러운
여인이었지만 나는 일견해도 그에 어울리지 않는 라이더의 차림새였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나도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그녀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걷게 되는 것을 알았다.
“여기... 카페 이름 무척 귀엽죠?..................................................”
해변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여자가 말했다. 처음 들어오면서 카페 이름을 보고 나도 조금 실소를 했었다. 카페 이름이
체리라니. 카페 체리. 귀엽기는 하지만 그리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뭘로... 드시겠어요?........................................”
메뉴판을 돌아봤다. 그러다 말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풋..................................................”
그녀가 왜 웃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 있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세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다 말고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내 가슴을 덜컹이게 했다. 그 그림자를 배경으로 흐르는 카페 이름 같지 않은 아주 무거운 음악이 더욱
그 그림자를 짙게 했다.
알고 있니 끝내 우린 남이 될 수 없기에 가슴속에 내 남은 사랑 묻어두고 가는 걸...
해질녘 노을 보며 함께 수놓은 꿈들은 스치는 바람처럼 다 부질없는 꿈이 였나...
보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추억도 고이 접어 간직하려 해 이별 뒤에 그 약속까지...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영원보다 더 오랜 동안 사랑하겠노라고...
노래가 끝나서야 다시 그녀 앞에 다가가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게 물었다.
“영원보다 더 오랜 동안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억이 났다. 내 등 뒤에서 그녀가 흥얼거리던 그 노래. 이승훈의 마지막 편지라는 노래였다.
“.....................................................”
벌써 밤이 깊었다. 아주 분주한 서울의 밤은 여전히 그 분주함으로 밤을 잊은 듯 언제나처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제라는 시간을 분기점으로 변화에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 들려진 언더락의 차가움이 어느새 물방울을 맺으며 겉으로 흘러
내려 생각에 붙들린 내게 지금의 이것이 현실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고 기억에 선명한 모든 것이 환상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자꾸 허전해졌다.
“추워요..................................................”
그녀의 말에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온도를 높여도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바닥의 온기는 나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뒤에서 좀 안아줄래요?...........................................”
가슴이 떨려왔다. 숫총각도 아닌 내가 말이다. 온 몸이 경직되어와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그 말에 나는
따라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를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이불을 들추고 그 속을 기어가
돌아누운 그녀의 등뒤로 몸을 붙여갔을 때 나는 호흡조차 하기 힘들어 한동안은 숨조차 멈추고 있었다. 내 손은 어정쩡하게
내 뒤로 제쳐져 있기까지 했다.
그녀의 한 손이 뒤로 와 내 어깨를 더듬더니 내 팔을 잡아 끌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그제서야 나는 다른 한 손도 그녀의
머리 밑으로 넣어 어깨를 밑에서부터 감싸주었다. 내 손이 지날 때 그녀도 머리를 들어 내 손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안고도 내 몸은 그녀에게 완전히 붙어있지는 않았다.
“기왕 안아줄 거면 꽉 안아줘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물러서 내 가슴에 밀착했다. 그 순간 나는 내 민망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책 없이
이미 커져버린 내 물건은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듯 했다. 엉덩이를 조금씩 뒤로 빼려 할 때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건강해서 그런 거니까..............................................”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내 몸은 그대로 굳어진 채 멈춰야 했다. 그런 나를 향해 그녀의 몸이 더 깊이 밀려 들어왔다. 이젠
나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그녀를 가득 안고 몸으로 그녀의 추위를 녹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녀의 몸과 내 몸이 맞닿은 곳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이미 추위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마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내 몸까지 점차 그녀처럼 떨어가기 시작했다.
“만약에... 말이에요....................................”
목이 가득 메어와 ‘네’라는 짧은 말도 쉽게 대답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우리 오늘 밤... 하고 나서... 새벽에 헤어지는 것하고... 안하고... 저녁에 헤어지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걸 선택... 하시겠어요?.........................................”
충격적인 그 말에 잠시 나의 모든 것이 멈췄지만 잠시 후 다시 움직인 내 마음의 소리는 이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푸른 빛의 새벽이었고 그녀는 내 옆에 없었다. 깜짝 놀라 넓지도 않은 실내를 찾아 다녔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나 해서 창가로 다가가서 밑을 내려다 봤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여명이 다가오면서
사물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고개를 창에 붙이고 호수를 살펴봤다. 호수에는 물안개가 모락이며 솟구치고 있었고
벌써 몇몇 사람들이 호수 주변을 걷거나 뛰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저 건너편 익숙한 재킷이 눈에 뜨였다.
서둘러 그곳까지 나는 뛰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곧 있다가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그 자리의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아니 물가에 앉아
넋을 잃고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호수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녀 등 뒤에 다가설 동안에도 그녀는 나를 알아
채지 못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그녀의 눈길이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나를 향했다. 아주 천천히 호숫가 옆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별 말이
없었다. 그냥 가끔 손으로 눈 밑을 만졌고 가끔 하늘을 보며 눈을 깜빡였고 때로 땅을 보고 깊게 숨을 뱉곤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 두 걸음 뒤에서 경호하듯 뒤를 따르는 것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곳에그녀가 멈춰 섰다.
“설악산 가실래요?.........................................”
그녀의 미소를 보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난 그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리조트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설악산을 향했다. 시간은 아직 9시를 넘기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올 걸 그랬어요....................................”
“네?...........................................”
뒷좌석에 앉아 등을 편하게 기대고 있던 그녀가 몸을 숙여 내 귀에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벚꽃!... 볼 수!... 있었는데!... 아쉽다구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벚꽃 하면 남쪽 지방을 많이들 생각하지만 여기 속초와 설악산 입구의 벚꽃도 만만치 않았는데
시기적으로 조금 늦었다. 이미 꽃은 졌고 바닥에 그 흔적만 가득하다. 그 때 그녀가 무심코 말을 뱉다가 멈췄다.
“우리 다음에............................................”
“네?... 뭐라구요?............................................”
“아... 아니에요............................................”
미시령 방향을 거슬러 오르다 척산온천을 향해 좌회전을 해서 들어갔다. 이제부터 줄지어 선 벚꽃들이 그 꽃잎을 휘날리던
예전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아쉬웠다. 꽃잎 화사한 날에 지나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 같은 애인을 뒤에 태우고 그림
같은 그 속을 질주해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남자의 로망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내 애인이 아니거니와 꽃은지고 없었다.
가슴에 남은 것은 인삼을 씹고 난 듯한 씁쓸함이다.
“터널은!... 싫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 길을 아는 게다. 예전엔 목우재 삼거리를 넘어가는 이 길이 제법 험했다. 미시령의 축소판처럼.
그래서였는지 어느 날 터널이 생겼다. 옛길은 아예 차가 가지 못하게 막아놓고 오토바이 최대 적 중의 하나가 터널이다. 아주
답답함. 귀가 멍멍한 소리의 증폭. 배출되지 못한 자동차 매연. 피할 곳 없는 구속감까지.
줄을 쳐서 막아 놓은 길 옆을 살짝 비켜 풀섶으로 들어서 돌아들어간다. 이건 엄연한 두 바퀴의 자유로움의 권리다. 누군가
뒤에서 경적을 울린다. 배 아픈 누군가의 소리라 여기며 나는 무심히 지나간다. 넌 그 길로 빠르게 가면 되고 나는 여유롭게
맑은 공기 마시며 아름다운 경치 구경하며 가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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