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들의 행진곡 - 6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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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의 불을 끄고 아들옆에 누운 혜영은 점심때 명숙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곰곰히 회상하고 있었다. 얘기를 나눌때 심적으로 고생하는
친구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지만 명숙이 계속 그녀와 태수와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는것 같아서 은근히 기분이 나빴었다. 그녀와
태수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부부나 애인들처럼 그들 둘만이 간직하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생각되어
불쾌하기만 했었다. 나중에 명숙이 사과하는걸 듣고 그녀의 마음도 풀어졌으나 지금 또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기분이 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또다시 친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다. [그런걸 말하고 의논할 상대가 나말고 이세상에서 누가 있겠어?... 저도 오죽
고민스러웠으면 그랬을까...] 그런생각을 하자 친구와 서로 부부관계에 대해 말을 나눈거 같아서 저도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그러세요?"
"아직 안잤어?"
"네... 오늘 무슨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혜영은 몸을 돌려 어둠속에 있는 태수를 응시했다. 그러자 아들과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명숙때문에 별안간 태수가 고맙게 여겨졌다.
[하기야 이런일이 일어나면 명숙이처럼 생각해야 정상인데... 이왕 벌어진 일에 내가 잘 적응하게 있게된건 다 태수때문이지] 그러는데
문득 태수가 선규처럼 불만을 느끼는건 없나하는 걱정이 들었다.
"태수야"
"네?"
"혹시 나한테 불만같은거 있니?"
그러자 태수가 황급히 그녀쪽으로 몸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와 이러고 자는거에 대해 만족하냐는 소리야... 성인들도 그러는데 특히 네나이때는 호기심이 왕성할때잖아"
"....."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못알아듣겠어?"
그에게서 아무말이 없어 자세하게 설명해줄려고 하는데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태수의 손이 그녀의 머리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엄마가 절 사랑해주시는데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해요?"
"아니야... 네가 하고싶어하는게 있으면 말해도 돼"
"없어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태수의 진심어린 대답을 듣고 혜영은 속으로 안도와 기쁨이 넘쳐흘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만족한다는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선규가 저엄마에게 비디오방에 가자고 한것처럼 이상한걸 요구하지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걸 물어보세요? 엄마는 있으세요?"
"아니야...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거야"
"어디서 부부생활에 불만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셨어요?"
그말에 혜영은 폭소를 터트렸다. 함께 웃던 태수도 그녀의 웃음소리가 수그러들자 혜영을 끌어안고 깊은 키스를 한다음 그녀의 육체를
더듬다가 옷들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2학년으로 올라간 선규와 태수는 이번에는 다른반으로 배정받았다. 1학년때와 마찬가지로 각자반에서 태수는 반장을 맡았고 선규는
부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늘 하듯이 등교는 같이 했지만 하교는 그렇지가 않았다. 태수는 정희경 선생님이 다음담임선생님이 될 사람한테
말을 해준 덕택에 보충수업을 면제받고 신문배달을 하러 일찍 학교를 나올수가 있었으나 선규는 보충수업때문에 저녁이 되서야 집에
올수가 있었다.
남자 담임선생님으로 바뀌어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바쁜 공부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희경 선생님으로 인한 선규의 가슴속에 있던
공허함과 허전함은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집에서는 엄마가 예전보다 더 잘해주고 어떤때는 애인처럼 행동해서 이제는
다시 그녀가 그의 마음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태수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제는 문과반에서 공부하게 되어 처음에는 많은
걱정했었지만 엄마는 근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대해주었다.
유진은 3학년이 되어 조금 바빠진 까닭에 책방에 자주 들리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내어 찾아와 그와 얘기를 나누고 피아노도 함께 치곤
했다. 1년이 넘게 만나서 그런지 태수의 마음속에는 유진을 선규네같이 한가족처럼 편하고 스스럼없이 느껴지게 되었다.
2학년에 들어와 첫번째 기말고사를 치루고 어느 일요일날, 책방을 보고있는데 오랜만에 유진이 찾아왔다. 태수는 반갑게 맞으며 그녀와
얘기를 나눴다.
"누나는 요즘 많이 바쁘나봐요... 보기가 힘드네요... 엄마도 그러시던데"
"3학년에 올라가니까 이것저것 할일이 많아지네... 아주머니는 안녕하시지?"
"네"
"너는 학교생활이 어떠니?"
"똑같아요... 하지만 내년에 고3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하기도 하고요"
"공부 잘하면서 뭐가 불안해? 다 잘 될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자꾸만 불안해하면 신경쓰여 잘될 일도 못되는 법이야"
그말에 태수는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유진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줄뿐만 아니라 용기도 복돋아주고 조언도 해줘서 엄마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고민이 있으면 그녀에게 어려움없이 털어놓곤 했다. 형제가 없던 태수에게 유진은 친누나같이 여겨져 형제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었다.
"대학에서 직업은 구체적으로 언제 정하게 되요?"
"빨리 할수록 좋겠지... 늦으면 급하게 되서 그냥 아무 회사나 들어가야 하거든"
"그럼... 누나는 피아노선생님이 되기로 결심을 굳힌거에요?"
"응... 너는 뭐 할건데?"
"영문과에 갈려고 해요"
"영문과?"
"네...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요"
"외국어 잘하면 좋지... 교수같은걸 할려고 그래?"
"그냥 이것저것 생각중이에요... 그런데 왜 교수라고 생각했어요?"
"글쎄... 왠지 너에게는 평범한 회사원보다 교수나 학자가 어울리는거 같애"
"그래요?"
"응... 피아노 기르칠때 보니까 넌 그냥 배우기보다는 탐구하는 면이 있더라... 끈질긴 점도 있고..... 그래서 뭘 배우고 그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걸 잘 할거 같애"
"저한테 그런면들이 있다는건 몰랐는데..."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가르치는건 누나가 잘 하잖아요"
그리고는 둘이 서로 웃음을 짓고 한동안 얘기를 더 하는데 별안간 문이 열리며 선규가 들어왔다.
"네가 여긴 왠일이냐?"
"이 근처에서 친구들 만났다가 너와 같이 집에 갈려고 왔어... 곧 책방문 닫을 시간이잖아... 그런데 손님이 계시네... 어?"
선규는 그를 쳐다보는 유진을 보고 두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에 여기서 만났던 분이시죠? 태수에게 피아노 가르쳐주고요"
그러자 태수는 선규와 어리둥절해 하는 유진을 번갈아 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역시 기억은 잘하는구나... 얘가 저와 제일 친하다는 선규에요... 작년에 여기서 한번 봤었잖아요"
"아... 기타를 잘 치신다는 친구분이시구나... 반가워요"
유진이 일어나서 인사를 하자 선규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말씀 놓으세요. 태수친구인데요"
"그럴까요?"
"그렇게 하세요, 누나... 저한테 하는거처럼 편하게 말하세요"
태수의 말을 듣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선규도 옆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피아노를 잘 가르치시나 봐요... 작년에 음악시험때 보니까 태수가 아주 잘 치던데요"
"태수가 잘 해서 그런거지"
"아니에요... 누나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잘 칠수가 있었겠어요?"
"태수야, 아직도 피아노 쳐?"
"응... 가끔가다"
선규가 알수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진이 말했다.
"너도 시간되면 태수와 같이 와... 태수에게 기타를 잘 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한번 듣고싶다"
"그럴게요... 그런데 잘 치지도 못하는데 태수가 괜한 말을 했나 보네요"
"갑자기 왠 겸손이냐? 돈주고도 못듣는 연주라면서"
"음악선생님앞에서 어떻게 그러냐? 망신당하면 어쩌라고"
함께 웃던 선규는 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클래식음악만 하는거에요?"
"대중음악도 해"
"선규는 작곡도 할줄 알아요"
"그래?"
태수의 말에 유진은 놀라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선규는 쑥스럽게 웃으며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작곡한 곡들이 있어?"
"그냥 장난으로 몇곡을 썼었는데 전부 완성하지는 않았어요... 대단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그럴수 있다는게 어디니?"
고개를 숙이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듯한 선규에게 유진은 다시 물었다.
"작곡은 어디서 배웠니?"
"1학년때 담임선생님께 배웠어요"
"아... 음악선생님이라고 그랬지... 그럼 작곡공부는 계속 할거야?"
"아니요... 기본은 터득했으니까 이제는 제가 스스로 써야죠... 작곡도 뭘 창조하는건데 전 자연스럽게 나와야 된다고 믿어요... 누구에게
계속 배운다면 그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저만의 진실한 음악이 나올수가 없잖아요"
유진은 한동안 선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다음 태수와 선규와 좀더 얘기를 나누다가 책방을 떠났다.
유진이 가고난후 태수는 선규와 책방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그 누나와는 자주 만나니?"
"유진이누나?"
"응"
"누나도 요즘은 바빠서 자주 못만나"
"서로 안지 오래됐지?"
"응... 1년이 넘었으니까"
"정이 많이 들었겠다"
장부를 챙기던 태수는 그말을 듣고 엷은 웃음을 띄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선규야, 선생님 보고싶니?"
"....."
"정희경 선생님말이야... 너도 선생님한테 정이 많이 들어 있었을거 아니야... 아까 작곡얘기를 할때 선생님 생각하는거 같더라"
잠시 책들을 멍하게 보고있던 선규는 중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나에겐 감사한 분이지... 엄마와 너희엄마외에는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잘 해준 사람이 없었거든... 가끔은 보고싶긴한데 떠나신 분을
자꾸 생각해서 뭐해"
말은 그렇게 했어도 태수의 눈에는 선규가 선생님을 그리워 하는것 같고 또한 쓸쓸하게도 보여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나중에 네가 잘되서 한번 선생님뵈러 찾아기면 되잖아... 그리고 네옆에는 아줌마가 계시니까 힘내라"
"그래야지"
계속 중얼거리던 선규는 환한 표정으로 바꾸고 돌아섰다.
"빨리 정리하고 가자... 아줌마가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시겠다"
태수가 웃으며 정리를 계속 하는데 옆에서 잡지들을 치우던 선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X세대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라"
태수가 보니 잡지표지에 최근에 인기있는 젊은 가수사진밑에 X세대가수라는 표제가 쓰여져 있었다. 선규는 잡지를 내보이며 못마땅
하다는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전까지는 신세대 그러더니 이제는 툭하면 X세대라고 하고... 그냥 젊은 세대, 차세대 이러면 될거 가지고 이런말을 쓰면 멋있어
보이나보지?"
"넌 싫어?"
"사방에서 그러니까 짜증난다.... 신세대와 X세대가 뭐가 차이나냐?... 이거 분명히 외국에서 나온 말을 듣고 그러는걸거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서 온 말이라면 유식해 보이는지 알고 아무데서나 쓰잖아"
"맞어... 뜻도 모르고 쓰지"
"넌 X세대가 무슨뜻인지 알어?"
"응... 그건 70년대에 캐나다 사회학자가 지어낸 단어야"
"뭐야? 그럼 옛날에 나온 단어를 가지고 우리는 지금와서 이러는거야?"
"우리나라는 젊은세대들의 의식이 몇년전부터 바꼈잖아... 원래 서양에서는 60년대에 그랬대.. 기성세대들이 젊었을때와는 아주 다르게..
그사람들은 국가가 부르면 전쟁터에 나가고 그랬는데 젊은이들은 뭣하러 전쟁에 나가냐고 주장하면서 개인적인 성향으로 변했거든"
"월남전 얘기를 말하는구나"
"응...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하며 스스럼없이 어른들에게 주장을 내새웠대.. 사회변화와 일종의 계몽이 온거지.. 그런데 70년대는 달랐어"
"어떻게?"
"60년대의 젊은이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했는데 70년대에 전쟁이 끝나고 아무일이 없어서 그런지 그때 젊은세대들은 그냥 즐기는거에만
만족했대... 아무생각도 안하고 디스코텍에 가서 춤이나 추고"
"머리에 든거없이 향락주의에 빠져든거구만"
"맞아... 그래서 그당시의 어떤 캐나다 사회학자가 노는것만 찾는 젊은세대들의 작태를 비꼬아서 수학의 미지수 X를 넣어 X세대란 말을
만든거야"
"미지수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한심하다는 소리군"
"그렇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뜻도 모르고 그저 멋있게 들린다고 쓰고있으니...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걸 부추키는 언론도 문제가
많아... 뭘 제대로 알고 말해야될거 아니야"
잡지의 표제를 다시보던 선규는 도리질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맞는 말인거 같애... 요즘의 우리나라 젊은애들도 미팅하고 나이트나 가며 놀기만 하잖아. 그러니 X세대가 맞네"
"네말을 듣고보니 그렇긴 하다"
"이제부터 누가 X세대라 부르면 화내야 되겠다"
둘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책방을 마저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초가을이 되어 바람은 조금씩 선선해지고 있었다. 명숙은 약국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반팔에서 길어진 소매로 바뀐걸 보니 가을이 왔다는게 실감났다. 선규가 2학년이 되고난뒤 그동안의 생활은 별탈없이
무난해서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지난 겨울에 혜영의 말을 듣고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선규에게 남자대하는것처럼 노력했었다.
물론 아직까지 근친상간을 한다는 죄의식이 남아있었지만 혜영의 말처럼 어차피 이렇게 된 일을 돌이킬수도 없어서 선규와 그녀 모두가
만족해 하며 사는쪽으로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오럴섹스에 거부감이 사라지지않아 있었고 오르가즘도 오지를 않아 선규와의
성행위에는 벌다를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선규도 달라진 그녀의 태도를 의식해서인지 불평이나 비뚤어짐없이 그녀의 말을 잘들어주어
작년같이 충돌은 없었고 어느때보다 공부에 더 몰두해 있었다.
이렇게 생활하니 별 어려움이 없어서 명숙도 아들과의 관계를 남들만 알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생각이 차츰 들게 되었다. 그래서 선규가
대학에 들어가기전까지는 어떤 변화가 없고 이대로 살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바램은 그녀의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약국문을 닫을려고 일어나는데 문이 열리며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
수줍은듯이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명숙은 숨이 막혀 버렸다. 6년이 넘게 보지를 않았지만 그녀가 한남자로서 유일하게 사랑했고
결혼해서 함께 살았던 사람이라서 한눈에 알아볼수가 있었다. 이제는 나이가 든 흔적들이 있었지만 양복을 말끔히 입고 훤칠한 용모와
깔끔한 인상은 여전했다. 선규아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있었어?"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충격을 받은 명숙은 엉거주춤 서서 계속 숨도 못쉬고 있었다. 입구쪽에 서있던 선규아빠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많이 놀랬나보구나... 미리 연락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선규아빠의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며 명숙은 간신히 진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낯익었던 목소리를 오래간만에 듣고 저도모르게 머리를
매만지던 자신을 발견해 흠짓 놀랐다. 그순간 전남편과 헤어지던 일들이 떠올라 명숙의 얼굴은 차갑게 변했다.
"여기는 왠일이에요?"
"그냥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들렀어"
"이미 끝난지가 오래됐는데 궁금할게 뭐가 있어요?"
"그성격 여전하군...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그렇게까지 할건 없잖아... 그냥 약국에 찾아오는 손님대하듯이 해줘"
여전히 미소띤 상냥한 얼굴로 말하는 선규아빠를 보니 자신을 배신했던거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끝난 사이고 그의 말대로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에게 냉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찬바람이 부는 인상을 어느정도 풀고 편한 자세로 바꿨다.
"언제 왔어요?"
"두달 됐어"
"그냥 들른거에요?"
"아니... 외국에서 벌였던 사업을 이번에 한국으로 확장했어"
"사업이 잘 되는 모양이군요"
"운이 좋아서 그런지 괜찮게 되고 있어"
그말에 명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한 짓들은 괘씸했지만 선규아빠의 능력은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다.
"가족들은요?"
"내가 한국과 외국을 다녀야 해서 가족들은 여기로 왔어... 집사람이 한국을 그리워하기도 해서"
집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옛날에는 집사람이면 그녀를 지칭하는거였지만 이제는 선규아빠의 집사람이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이어서 마치 뭔가를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그때 그여자에요?"
"응"
"자식들은 있어요?"
"5살과 2살짜리 딸들이 있어"
그말을 듣고 명숙은 다시 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혼자서 선규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왔는데 선규아빠는 애들을 낳으며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배신감도 들고 불공평하게 생각되었다.
"행복하시겠군요"
그녀의 비꼬는듯한 소리를 듣고 선규아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는 않아... 아내와 나이 차이가 나니까 서로 생각하는게 달라서 어려운점도 있고 그래... 그리고 당신에게 죄를 지었는데 내가 행복
할리가 있겠어?"
선규아빠의 쓸쓸하고 뉘우치는 기색을 보고 명숙에게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지않고 전남편이 측은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입에서는 한결 풀어진 소리가 나왔다.
"당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건데 어떡하겠어요?.. 힘들더라고 참고 살아야죠... 또다시 결혼을 실패할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당신말이 맞어... 근데 당신은 아직도 혼자야? 여길 찾아올려고 알아봤더니 명의가 당신이름으로 되어있더군"
"당신과 헤어진 이후로 남자들이 지긋지긋해서 아무도 안만났어요"
그소리에 선규아빠는 왠지 기분이 좋아진것 같았다.
"힘든거 있으면 어려워하지말고 말해... 내가 그정도는 도와줘야지"
"지금 이상태로도 어려움은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말아요"
"그래.. 당신이 알아서 잘 하겠지.. 그래도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그래주고 싶어서 그래.. 친구로서 도와줄게"
그리고는 양복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어느 소프트웨어회사의 대표이사라고 적혀있었고 전화번호와 이메일주소가
있었다.
"컴퓨터사업을 해요?"
"응... 요즘 그런게 촉망받거든... 앞으로 크게 될 분야야"
명함을 받아들고 다시 선규아빠를 바라보았다. 영화배우처럼 미남인 그의 얼굴을 보니 선규의 외모가 하루가 다르게 수려하게 변하는
이유가 깨달아졌다. 그전에는 몰랐었는데 부자라서 그런지 전남편에게서 아들모습이 많이 보였다.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뭐가요?"
"난 그래도 그동안 나이든게 보이는데 당신은 예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야"
그말을 듣고 명숙은 저도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선규아빠는 연신 싱글벙글거리고 있었다.
"선규는 많이 컸지? 이제 고등학생이겠구만"
"2학년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구나... 선규는 집에 없어?"
그제서야 명숙은 선규가 보충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라는게 퍼득 떠올랐다. 그동안 저아빠얘기만 나오면 적대감을 보여 선규가
이 광경를 본다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갑자기 불안해진 명숙은 시계를 보다가 다시 차갑게 물었다.
"선규는 왜 찾아요?"
"나이가 드니까 자식생각이 나더라고... 딸들은 아직 너무 어리고 하니까 선규생각이 더 나더라"
"그럼 선규를 보러 온거에요?"
"선규도 보고 당신도 보고싶어서 온거야"
쑥스럽게 말하던 선규아빠는 초조해하는 명숙을 보고 이상한듯이 쳐다보았다.
"선규는 아직 안왔어?"
"보충수업을 받느라 늦게서야 오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그럼 언제 볼수있는데?"
"여기에 두번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
"여태까지 잘 지내던 애에게 혼란을 줄거에요?"
"혼란이라니?"
그러는데 문이 열리며 책가방을 든 선규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저아빠를 손님으로 생각했는지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들어오던 선규는 명숙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손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6년만에 처음보는 자기아빠를 모호하게 쳐다보던 그의 안면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부자간의 상봉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명숙도 선규의 반응을 보고 한순간 두눈을 질끔 감았다. 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었지만 그도 저아빠를 알아본게 분명했다.
아들을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나타내던 선규아빠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때는 가족이었던 그들사이에서는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명숙은 가끔씩 선규와 함께 선규아빠를 재회하는 모습들을 상상한적들이 있었으나 이런것은 아니었다. 전남편과 아들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러는데 선규가 그녀를 보고 다시 저아빠한테 고개를 돌리더니 적막을 깨며 입에서 차디찬 소리가
나왔다.
"여기는 왜 왔어요?"
"....."
명숙은 생애 저렇게나 냉랭한 목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었다. 어찌나 차갑게 들리는지 몸안에서 냉기가 많이 느껴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저아빠를 노려보고 있는 아들에게서 살기마저 느껴져 이대로 있다간 무슨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감이 들었다.
선규아빠에게 그녀가 화를 내는건 그렇다치지만 친아들인 선규가 함부로 대하게 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규야"
다급해진 그녀가 그의 팔을 잡을려고 다가갔으나 선규는 저아빠쪽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그녀와 선규아빠사이에 가로막았다.
"여기에 왜 왔냐고 물었잖아요"
"서..선규야, 나다... 네아빠야"
선규아빠가 간신히 입을 떼자 선규는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약국문을 가르켰다.
"나가주세요... 그리고 엄마와 난 당신을 볼일이 없으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그리고는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엄마, 이리와봐"
그의 말대로 저도모르게 다소곳이 아들옆으로 다가간 명숙은 선규아빠앞에서 보인 자신의 행동에 흠짓 놀랬다. 선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저아빠를 노려보다가 아까보다는 수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엄마는 들어가있어"
명숙은 머뭇거렸으나 선규의 눈빛을 보고 도저히 거역할수가 없어서 집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선규아빠에게 어서 가라는 눈짓을
보내면서 들어갔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
"빨리 나가주세요... 여기는 당신을 반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한동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잠시후 약국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명숙이 급히 나가보니 약국안에는 선규뿐이었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닫혀진 약국문을 바라보던 선규는 열쇠를 들고 밖에 나가 셔터를 내리고 문을 잠궜다. 아무말없이 그러는 아들에게
두려움이 든 명숙은 선규가 차가운 얼굴로 다가오자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서..선규야"
"어떻게 된거야? 엄마가 불렀어?"
"아..아니야... 네아빠가 너보고 싶다고 찾아온거야"
냉랭한 기색에서 알수없는 표정으로 변한 선규는 하얗게 된 그녀를 보다가 책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심장이 급하게 뛰어
들어가는 아들을 멍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조금후에 제정신을 찾으며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선규는 자기방안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우뚝 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다가가는것도 겁이 나서 문지방앞에 서있는데 별안간 선규가 책상옆에
세워져 있던 기타의 네크를 두손으로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그순간 명숙은 본능적으로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선규야!"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선규는 항상 엄마다음으로 자신의 보물2호라고 일컬으며 애지중지하게 아끼던 기타를 책상에 세차게 내려쳤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기타는 산산조각이 나고 부서진 파편들은 온사방으로 흩어졌다. 파편에 맞아서 찢어졌는지 선규의 손등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피를 보며 명숙은 그만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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