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천사 - 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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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문제는 삼거리와 합류하는 곳에 있었다. 피해갈 곳 없는 양쪽 사이드. 혼자라면 그냥 뛰어 넘어 가려 하겠지만 그녀를
태우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애마를 세웠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려서 먼저 걸어 가실래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이 놈 생각보다 무거워요... 들기보단 날아가는 게 더 낫죠..................................”
“어떻게 날아요?.........................................”
“다... 방법이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그녀가 저 만치 가게 하고 새들 백에서 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반으로 접혀져 있는 아주 긴
이등변 삼각형의 나무토막 바닥 면에는 우레탄이 덮여 있어 미끄러지지 않게 해준다. 거리와 높이를 머리 속에 그리며 적당한
위치를 선정한다. 그리고 뒤로가 애마에 올라 각도를 조절하고 rpm을 높였다가 순식간에 나무토막을 밟고 날아오른다. 하긴
기껏해야 2~3m나 될까 말까 했다.
뒷 바퀴로 가볍게 안착하고 나서 녀석을 세우고 돌아가 무기를 회수하는 동안 그녀가 아이처럼 박수를 쳐댔다. 신기한 돌고래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차들이 돌아본다. 내려진 차 창에 보여진 얼굴에는 이렇게 써있는 것 같았다.
‘별... 미친 놈!...........................................’
다시 그녀와 길을 따라 올라간다. 긴 벚나무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저기 설악산이 점차 다가온다. 꽃같이 향기로운 5월
설악의 아침을 깨우며 우리가 간다. 다시 또 굳어진 그녀의 얼굴에 나도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라 함께 구경하던 그녀가 잠깐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방금 전의 일이다. 순간 아이처럼 놀라 그녀를 찾아 이리 저리
시선을 돌리다 발견한 그녀는 아주 까마득한 발 밑의 절벽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비탈진 바위 면에 서서 멀리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그녀가 입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내가 왔어!... 내가 왔다구!... 내가 왔단 말야아~~~!.........................................”
그 소리는 흡사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처럼 슬프게 메아리 쳤다.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그녀 옆에 다가가 뒤에서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나의 손을 통해 감전이라도 된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진동이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더욱 뛰게 만들었다.
“원래... 유명한 집치고 맛있는 집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 말 정말 맞는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대표적이죠.....................................”
“거기가 어딘데요?.................................”
“초당 순두부!..........................................”
“거긴... 원조집이 있지 않던가요?.......................................”
“있죠... 그런데 명성만큼 맛있지는 않아요... 대신 정말 맛있는 집은 숨어 있죠........................................”
“그래요?.................................................”
우리는 속초를 떠나 주문진을 거쳐 강릉으로 내려왔다. 바닷가를 따라 내려 온 탓에 곧 바로 다다른 경포대에서 십리 바위를
바라보던 그녀가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며 그렇게 말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뒷좌석에서 지휘관처럼 지시하는
대로 애마를 몰고 가니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소개한 그 집이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다.
“여기가... 원조는 아니지만... 맛은 원조집보다 더 나아요...................................”
원조집을 지나쳐 강릉고등학교 정문 바로 전 사거리에서 직진해서 들어온 이 집은 정말 허름했다. 아마도 나 혼자 지나치는
길이었다면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테이블도 대여섯 개 정도였고 모두 좌식이었다. 부츠를 신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구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 두리번거리며 식당 안을
살펴봤다. 잘나가는 집마다 있는 유명인의 사인이라곤 없는 이곳은 한적한 시골마을의 그야 말로 시골식당 모습이었다.
“믿어 보세요.......................................”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아마도 내가 집의 초라함으로 미리부터 선입견을 가질까 걱정 하는 모양이었다.
“기대해보죠...........................................”
“넵!...................................................”
그녀의 소리에 나도 모르게 또 미소가 나왔다. 왜 그런지 모르게 그녀를 보거나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이렇게 자꾸 웃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곧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차려진 상은 초라하고 시골스러움의 전형이었지만
까맣고 진한 된장국과 구수한 두부의 향과 맛은 내가 먹어본 중의 단연 최고였다.
“어때요?... 괜찮죠?...........................................”
입안 가득한 두부를 물고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왼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와... 다행이다!................................................”
그녀가 귀엽게 손뼉을 쳤다. 때로 당찬 듯하다가도 저렇게 아이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조금 부조화스럽기도 했다가 저것이
그녀다운 모습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구멍을 술술 넘어가는 두부처럼 그렇게 우리의 시간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물처럼 흘러갔다. 정동진을 지나 산을 넘어 옥계해수욕장 근처에 와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더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야간 라이딩을 겪어야 할 것이다.
“왜요?.......................................”
“길을 좀 가로질러 갈까 해서요..............................................”
“이 길 좋은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도 우리나라의 등줄기를 따라가는 이 길이 좋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 다시 함께 밤을 보내야 한다면 그 땐 나도 더 이상 나 자신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말아요... 정말 멋있는 곳을 보여줄게요........................................”
“정말이죠?...................................”
“믿어 보세요.................................................”
“좋아요... 그럼!... Let’s go!.........................................”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매봉산 옆을 가로질러 산을 올라갔다. 대부분의 사람은 잘 모르는 길일 테지만 이 길의 끝에는
동해시에서 시작해 인천 중구까지 이르는 42번 국도와 만난다. 그곳에서 새말까지 와서는 다시 6번 국도로 갈아타기까지의
사이에는 산골의 고즈넉함과 산과 강과 기차와 자동차가 함께 달리는 그림 같은 풍경과 스키장과 골프장이 가득한 놀이동산
같은 동네를 지나 싱거운 듯 중독성 있는 안흥찐빵을 맛볼 수 있는 곳을 지나며 점차 도시화 되어가는 지역적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변화의 매 마디마다 그녀는 놀라운 탄성을 지르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행의 시작점이던 팔당에 이르러서
그녀가 말했다.
“서울의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정말 몰랐어요..............................”
팔당대교를 막 올라서 다리를 건너기 전, 나를 세운 그녀가 저기 물길 건너 이제 막 지려하는 노을을 보며 말했다. 그랬다.
정말 오랜만에 바라보는 서울의 노을이었다. 도시 속에 갇혀서 살다 보니 노을을 바라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아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노을이란 것은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치부했다. 그러던 노을이 저렇게 아름답게
서울 하늘을 그림 같은 배경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곧 다가오는 그녀와 나의 짧은 동행의 끝을 장식을 했다.
“언제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내일이면... 다시 볼 수 있을 텐데요..........................................”
“아닐 거에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요?..........................................”
“내일은... 같이 볼 수 없을 거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가슴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의 그녀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입가에 그려진 미소만이 전부였다.
(그래... 그냥... 짧은 동행이었을 뿐이야................................)
그것이 그나마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정말... 고마웠어요.........................................”
“별말씀을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그럼.............................................”
그녀가 목례를 하고 점차 멀어져 갔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소리쳤다.
“저... 잠깐만요!..................................................”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름... 이름이 뭐에요?................................................”
그녀가 웃었다.
“서희에요... 강서희!.................................................”
“난... 진석이에요... 박진석!...........................................”
그녀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아마도 내 이름을 불러보는 듯 했다. 그리곤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선릉역 아래로 사라지고 나서 난 내 머리를 두들겼다.
“바보!... 전번!!............................................”
그랬다. 인구 천만이 넘는 서울에서 이름으로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나는 손에 든 잔을 단 번에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행운이 두 번 오기는 아마도 불가능한 것이겠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
흔하게 만나던 환자들처럼 나도 오늘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최면에 빠진 연주양을 바라보며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미 솔직함에 대한 신뢰를 잃은 환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환자에 대한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의사로서 사회적 양심에 반하는 일에 동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망설임은 있었지만 나는 마음을 굳히고 이 일을 하기로 했다. 치료가 아닌 진실에의 접근이다.
“여긴 비밀의 방이에요... 연주양만이 열어볼 수 있는 연주양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곳이죠... 그래서 무엇이든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요... 솔직해질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죠... 어때요... 편안하죠?...................................”
“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여기 이 방에 숨겨 놓도록 해요... 그러고 나면... 마음에 있던 짐도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가벼워질 겁니다... 자... 제일 먼저 무엇을 숨기면 좋을까요?..........................................”
“숨길 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없어요..............................................”
그 말이 내겐 충격이었다. 어떻게 마음에 숨길 것이 하나도 없을까? 경험상으로도 내가 연주양과 했던 상담의 내용으로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 생각해 봐요... 아마...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쯤은 있을 거에요.................................”
그 때 들려온 연주양의 소리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전혀 없어요..................................................”
그건 연주양의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연주양의 목소리를 빌어서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연주양의
본질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소리라고 짧은 순간 연주양을 지켜보다 강수를 뒀다.
“당신은 누구죠?...............................................”
“........................................”
“대답을 하세요... 당신은 누구죠?...............................................”
대답이 즉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존재가 연주양이 아님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건 분명이 연주양이 아닌 섣부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다른 무엇임에 틀림없었다.
“왜... 연주양 속에 있는 거죠?...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
“.............................................”
“말하지 않으면 당신을 연주양 밖으로 끌어내겠습니다..................................”
“넌... 그럴 수 없어!................................................”
순간 연주양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나를 노려보았다. 잠시 놀랐지만 나도 지지 않고 연주양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후 연주양은 다시 눈을 감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나의 암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양이
스스로 눈을 뜨며 최면에서 일상의 의식상태로 전이한 것이었다.
“머리가 좀 아파요..........................................”
“연주양?..............................................”
“네?................................................”
순순한 대답이 그녀로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아뇨... 아무 것도... 뭐가... 잘못됐나요?...................................”
“오늘은 최면집중이 잘 안되는 것 같군요...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하죠... 머리가 아픈 건 일시적일 거에요...
혹시... 시간이 많이 지나도 계속 아프면 바로 연락해줘요... 알았죠?........................................”
“네... 선생님... 저도... 오늘 컨디션이 좀 그러네요............................”
진단서를 요청할 줄 알았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어쩌면 그녀의 무의식이 어서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지도 몰랐다.
연주양을 내보내고 나는 상담일지를 쓰며 스스로 약간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의 상황을 다중인격장애의 다른 인격의
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에 집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다중최면 중의 선최면이 방어기재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앞서 누군가 연주양에게 최면암시를 걸어서 자신의 내면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문을
잠근 것이다! 이 특별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멍청히 창 밖을 바라보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다... 진석이... 시간 괜찮니?....................................”
“어... 그래... 회의가 있어서 나가봐야 하긴 하지만... 한 5분쯤 시간 있다...............................”
“간단하게 물어보마... 전에 나에게 보낸 정연주양 있지?.....................................”
“왜... 뭔... 문제라도 생겼냐?......................................”
“연주양 나에게 보내기 전에... 혹시... 너네 병원에서 정신과 상담했었니?................................”
“어... 그랬지...............................................”
“담당은?..............................................”
“혜리... 였어.................................................”
“........................................................”
“무슨 문제라도 생겼냐?..........................................”
“아니... 알았다..................................................”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개자식!....................................”
“뭐라구요?... 지금... 욕하신 거에요?...............................................”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던 이양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내 두 귀로 분명히 들었는데... 선생님 그런 욕도 하실 줄 아세요?... 놀라운데요!....................”
“그건... 뭐에요?......................................”
“흠... 좀 전에 우체부 다녀갔어요... 선생님 앞으로 온 우편물들이에요...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좀 많네요.................”
이양이 다가와 내 책상 앞에 여러 개의 우편물을 내려놨다. 그리곤 조금 흘기는 듯한 눈매로 밖으로 나갔다.
“으이구..................................................”
그 뒤에 ‘내 팔자야!’하는 말이 붙으려다 참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다.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신경정신과 유혜립니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S종합병원 구내 커피숍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무척이나
길고 아주 초조하게 느껴졌다. 다시 또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녀였다. 한 때는 내 여자였지만 지금은 남의 여자인
사람이었고 그 과정에는 상처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함에 대한 자책으로 다시 그녀를 마주할 용기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그녀를 만난다. 내가 그녀를 만날 결심을 한 것은 아마도 내 안에 무언가 변화가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오랜 만이에요... 선배...................................................”
가운을 입은 채 앞에 선 그녀를 올려다 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자리에 앉는 그녀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았다. 내 시선은 테이블을 향했다.
“생각 못했어요... 선배가 전화 할 줄은...................................”
그냥 웃었다. 그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시간 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잘... 지내지?.........................................”
“저야... 뭐... 선배도 잘 지내죠?..................................”
“나도 뭐 그렇지.....................................”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간단하게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다고 전화로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네... 참... 차는 뭘로 드시겠어요?... 여기 셀프라서요....................................”
“아... 그렇군... 뭘로 할래?...........................................”
“여기... 저희 병원이잖아요... 손님 접대는 제가 해야죠.............................”
“그런가... 난... 헤이즐럿.........................................”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문대로 갔다. 그제서야 나는 시선을 들고서 그녀를 봤다. 언제나 단정하던 모습 그대로 오늘의
그녀도 그랬다. 가운이 무척 잘 어울리는 그녀 참 총명했었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미친 듯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
“괜찮나 모르겠네요... 선배는 맛보다 향을 더 중요시하곤 했었잖아요...............................”
“별 걸 다 기억하는군...................................”
“그러게요... 시간 지나도 저절로 생각이 나네요... 후훗....................................”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본다.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별로죠?.................................”
“음?... 아니... 괜찮아...........................”
“다행이네요..............................”
“바쁠 테니 간단하게 말할게... 몇 개월 전에 한 환자를 상담했을 거야... 정연주라고... 대학 2학년 여학생... 기억 나?........”
“아... 우리 병원 이사장 손자하고... something 있었다던?...............................”
“그렇다고 하더군..................................”
“기억나요... 임신중절 수술 후에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호소했었죠......................”
“그 때 혹시... 뭐... 특별하거나 이상한 거 기억 나는 거 없어?....................................”
“글쎄요... 당시 상담기록을 봐야 알겠지만... 지금 생각에는 별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왜요?... 혹시... 선배한테 갔어요?.........................................”
“응...................................”
“그래요?... 어떻게 알고요?....................................”
“현호가 소개를 했다고 하더군....................................”
“그이... 가요?..................................”
“음... 아마... 이사장 손자 문제고 해서 일부러 외부에서 상담을 받았으면 했던 모양이지........................”
“나한텐...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내부 사정이 있었겠지...............................”
“네........................................”
“몇 번 상담을 해보니 무언가 좀 이상한 게 있어서 말야..................................”
“이상한 거요?.........................................”
“음... 혹시... 치료하면서 다중인격체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나?...................................”
“다중인격체요?... 아뇨... 전혀.......................................”
“그럼... 혹시... 최면요법 사용은?................................”
“그럴 이유가 없었죠... 스트레스와 불면증 정도에 최면요법을 이용할 이유가 없잖아요... 현실적인 건데.................”
“그랬군... 그럼 혹시 혜리가 상담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상담을 받았단 적은 없다고 하던가?............................”
“글쎄요... 그런 이야긴 기억에 없고... 어디 시골에 있는 종교단체 수련원에 있었다고는 들었어요.........................”
“그래?... 거기가 어딘데?.....................................”
“그건 기억에 없구요... 상담기록을 봐야 알 것 같은데요...................................”
“좀... 알아봐줄 수 있을까?.........................................”
“공식적으론 좀 어려운데.....................................”
“부탁해..................................................”
“선배... 부탁이니 제가 찾아볼게요... 근데... 저희는 개인병원이 아니어서 제 환자였다고 해서... 지난 상담 화일을 마구 열어
볼 수는 없구요... 음... 아... 요즘... 제가 논문 준비하는 게 있으니 사례연구에 참고하는 걸로 해보죠.....................”
“고마워...................................”
“아니에요...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죠........................................”
또 그냥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탁하고 갈게........................................”
“네... 연락드릴께요..............................................”
밖으로 나가는 회전문에서 나는 몇 걸음 뒤에 서서 나를 보는 창문에 비친 그녀의 눈을 봤다. 비록 거울로 보듯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촉촉한 그녀의 눈빛 만은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 눈길에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바라보지 말자던 그녀의 눈을 보았다.
(이양이 어디 갔지?)
다시 병원으로 왔을 때 당연히 자리에 있어야 할 이양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했지만 테이블에 있는 오늘의
스케줄 표를 보며 기다려도 이양은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어딜 가면 간다고 메모라도 남길 것이지.)
오후 스케줄을 확인하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생각 속에 있다가 책상 위에 던져둔 온갖 우편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기분전환 삼아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회보, 청첩장, 고지서 등을 넘기다 눈에 들어온 편지 하나였다. 정상적인 우편물이 아닌
소인 없는 직접 배달의 편지.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뭘까? 겉봉엔 그저 받는 사람에 내 이름과 병원 이름이 있을 뿐이다.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프린터된 글씨들이다.
봉투를 뜯자 그 속엔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앞 면에 검은 테두리가 있고 그 안에 장미 꽃 한 송이가 꽃잎이 뜯겨진 모습의
이상한 그림.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궁금증에 봉투를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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