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무원 - 1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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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물었다. 불을 당겼다. 혜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계속 통화를 이어 나간다.
"제가 갈께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통화를 끝내고 폰을 집어 넣는다. 행동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담배를
다 피웠다.
"오빠... 우리 같이 가요......................................................................"
내가 담배를 끄기를 기다린 듯 혜미가 불쑥 말을 건넸다. 아까부터 혜미의 말투는 짧게 끊어진다. 액센트가 웬지 딱딱하다.
차갑다. 순간 느껴졌다.
"그래... 같이 가자.............................................................................."
내가 대답하며 주저없이 몸을 일으켰다.
"오빠... 차로 같이 가요........................................................................"
혜미가 요구한다. 우리 둘은 밖으로 나와 차를 세워 놓은 곳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혜미가 손가방을 든 채 어디론가 잠시 달려간다. 화장실이라도 급한 건가?? 조금 시간이 걸린다. 나는 담배 한개피를 다시
피우면서 느긋하게 기다린다. 혜미가 저만치서 다시 달려온다.
"됐어요... 가요...................................................................................."
차를 몰아 약속장소로 달려나간다. 압구정 쪽이다.
"남자친구?.........................................................................................."
혜미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혜미는 계속 창 밖만 바라본다. 약속장소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
혜미가 폰을 꺼내들고는 전화를 건다.
"지금 도착해요...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세요............................................."
폰을 통해서 뭔가 짜증을 부리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혜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폰을 꺼버린다. 잠시 후 압구정의
근사해 보이는 카페 정문 앞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한 안경을 낀 뚱뚱한 친구였다. 또 한 사람은
다소 야무지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키가 큰 사내였다. 태화가 말한 그놈들인가. 차를 멈춰 세웠다.
"내리지 마세요... 금방 올거에요..............................................................."
혜미가 내게 불쑥 내 뱉더니 차에서 내려서 혼자 그들을 향해 걸어간다. 뚱뚱한 사내가 다소 어리둥절해 하면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몇 걸음 뒤에 서있는 키 큰 사내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뚱뚱한 사내는 혜미가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비아냥 거리듯이 소리를 친다.
"씨팔... 난 또 엉금엉금 기어오기라도 하는 줄 알았네... 야!... 괜찮아??... 저건 또 뭐냐?... 운전기사까지 대동했네??........."
순간 내 혈관이 팽배해지며 뭔가 울분이 단숨에 머리끝으로 치솟아 오른다. 꼬락서니랑 싸가지 없이 내뱉는 말투를 들으니
평소 스타일이 눈에 보인다. 혜미가 말 없이 사내 쪽으로 다가간다. 사내가 입가에 능글능글한 미소를 흘리더니 혜미가 아주
가까이 오자 몸을 출입구 쪽으로 돌린다. 바로 그 순간 혜미가 손가방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드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곧 이어서 혜미가 팔을 번쩍 치켜들고선 사내의 뒷통수를 향해 힘껏 내리친다.
"퍽!!......................................................................................."
아주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어헉~!!!!................................................................................"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그 놈이 비틀거리면서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지른다. 뜻밖의 광경에 나도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용수철 처럼 튀어 올랐다. 사내가 놀란 눈으로 혜미의 얼굴을 돌아보며 외친다.
"어흑~!!!... 야... 이 년아... 너 지금...!!........................................."
"퍽~!!... 퍽~!!........................................................................."
혜미가 다시 사내의 머리 앞통수를 두번 연속으로 내리쳤다.
"으악~!!!................................................................................"
사내가 머리를 움켜쥐며 그대로 쓰러졌다. 사내의 머리를 움켜쥔 손바닥 사이로 두 줄기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으윽~!!!................................................................................"
사내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혜미가 그 앞에서 서서 나뒹구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 큰 사내가 역시 놀라서 앞으로 다가오더니 몸을 굽히고는 나뒹굴고 있는 놈을 살펴본다. 고개를 들고서는 놀란 얼굴로
혜미를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혜미가 잠시 묵묵히 서있다가 쓰러진 사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서서히 몸을 돌린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무엇인가를 힘 없이 툭~! 하고 내 던진다. 남자의 주먹만한 돌멩이다. 혜미가 내 쪽으로 조금 전과는
다른 다소 힘이 빠진듯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키 큰 사내는 신음하고 있는 녀석의 상체를 일으켜서 부축한 채 그런
혜미의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혜미에 대한 어떠한 적개심이나 의아함도 그 사내의 얼굴에선 찾아보기 아주
어렵다. 그저 묵묵히 비틀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혜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요...................................................................................."
문득 내 귓가에 들려오는 혜미의 축 처진 목소리였다. 나는 흠칫 놀라며 어느샌가 내 곁에 다가와 있는 혜미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았다. 혜미가 흐느적흐느적 거리듯이 비틀거리면서 팔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어제낀다. 그리고 좌석에 푹 파묻히 듯
비틀거리는 자신의 형체를 앉혀간다. 고개를 위로 꺾어 좌석에 기대면서 눈이 감기고 있었다.
나는 고통에 차서 신음하고 있는 녀석과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내버려둔 채로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곧 출발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그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자 어디로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차에 속도를
좀 더 하며 질주를 시작한다.
"담배... 담배 좀... 주실래요...?......................................................."
혜미의 나직하지만 웬지 주저하는 듯한 조심하는 듯한 목소리다. 나는 묵묵히 담배 한개피를 혜미에게 건네주었다. 차창을
좀 더 아래로 내려주었다. 혜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더니 한모금 빨고는 "후우~!" 하고 한 모금 내 뱉는다.
입 담배질을 하고 있다. 담배를 피울 줄 모르는 아이다. 진정이 되질 않는 것이다.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다급한 것이다.
떨려오는 것이다.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혜미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내 담배를 쥐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팔이 떨리고 가슴이 어깨가 목이 고개가 혜미가 그렇게 떨고 있었다.
혜미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혜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도대체 무엇이 혜미로 하여금 사람의 피를 흘러내리게 하도록
만든 것일까. 지금 온 몸에 흐르고 있는 격정의 떨림 속에 혜미의 지난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괴로움이 온통 내비쳐지는 듯
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도 모르게 이빨로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내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니 약간 나아졌다. 얼른 손바닥을 들어 눈가에 맺혀오는
눈물을 닦았다.
"아끼는 동생이면 신경 좀 써라!!!..................................................................."
태화가 충고하던 한마디 말소리가 내 뇌리 속에 가득 울려 퍼졌다. 혜미는 아끼는 동생만이 아닌데 고개를 돌리니 혜미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미의 눈에서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혜미의 눈빛이 너무나 슬퍼보인다.
혜미야...왜 그렇게 울고있니 울지마. 제발 울지마라 혜미야. 내 가슴 속이 터져 폭발할 것만 같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혜미 울고있는 얼굴에 갑자기 처량한 미소를 한조각 띄운다. 서서히 입을
좀 더 크게 방긋 벌리면서 조금 더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보조개가 양 볼에 피어오른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주 슬픈
보조개가 양 볼에 흘러내린 눈물자욱을 품은 채 피어오른다.
"나... 이러면... 되는거죠?................................................................."
혜미가 눈물진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그렇게 나직이 혜미가 나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 속이다.
혜미의 속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보인 혜미의 눈 그 눈 속에 몇시간째 가득 담겨있었던 긴장과
불안함 지금 이 떨림을 통해서나마 애써 지우고 싶어하는 그 두려움 난 뚜렷이 느낄 수 있다. 살며시 입술을 떼어내었다.
"하아아.....!...................................................................................."
혜미의 나직한 호흡과 신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랗게 새어나온다. 혜미의 얼굴과 어깨와 등이 내 손길이 스쳐 지나가는
부위들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며 보들보들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잦아들기를 기대하면서 가만히 어루만져 나가는 내 손
혜미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다. 살며시 부드럽게 다시 내 입술을 혜미의 입술로 마주쳐 나갔다. 피로함과 지침의 긴장으로
메말라있던 혜미의 입술이 어느 순간부터 촉촉한 습기에 젖어들고 있다.
살짝 벌어진 혜미의 입술 속으로 보이는 혀 혜미의 혀가 나의 혀를 유혹하고 있다. 내 혀 끝이 혜미의 입술을 간지럽히며
혜미의 입술에 남았있는 습기를 핥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내 혀끝이 혜미의 입술을 건너 혜미의 입 속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혀 끝에 느껴지는 혜미의 치아 혀 끝으로 혜미의 치아를 이리저리 훑으며 건드려 보았다. 치아의 굴곡이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내 혀 끝에 느껴져 온다. 내 혀가 혜미의 혀를 찾고있다. 혜미의 혀도 내 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혀가 혜미의 혀와 닿자 한번 밀어 넣어 보았다. 밀려났던 혜미의 혀가 이내 반격을 해온다. 혜미의 혀도 내 혀를 한번 밀어
온다. 한번 밀고 또 밀어오고 이번에는 내 혀로 혜미의 혀를 끌어안고 내 쪽으로 아주 살짝 당겨본다. 엉키는 두 혀 교환되는
타액의 달콤함이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혜미의 볼이 뜨겁다. 혜미가 서서히 흥분하고 있다.
몸을 가득 에워싸고 괴롭히고 있던 긴장감이 풀려가고 새로운 긴장감이 먼저의 긴장감을 아주 슬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혜미를 애무해 나간다. 혜미의 몸은 흥분에 휩 쌓이는 내 손길의 거친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저
편안하게 그저 포근하게 그렇게 감싸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머리 속에 혜미에 대한 사랑만을 가득 담아서 혜미를 거칠게
다루고 싶어하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억제하고 있었다.
"아!..........................................................................................."
혜미의 신음소리. 이건 낭패다 통증이다.
"아... 아!......................................................................................"
혜미가 연거푸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한다. 나는 얼른 혜미의 몸에서 내 몸을 떼어내며 혜미를 걱정스레 살펴본다.
"괜찮니....?.................................................................................."
"................................................................................................."
혜미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선 침묵하고 있었다.
"미안............................................................................................"
혜미의 입에서 또 미안하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측은하고 안쓰럽다. 마음이 쓰라려 온다.
"미안해 오빠... 나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나도 알아요... 내 몸은 원하고 있는데... 내 몸이 뜨거워... 내 몸은 오빠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것 같네 오늘은................................................"
"그래........................................................................................"
내가 혜미를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여준다.
"아프지 마... 혜미가 아픈거... 나 이젠 못참아......................................"
혜미가 눈을 감은 채 슬며시 미소짓는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일찍 들어가는게 좋겠다... 집에 바래다 줄께......................................."
"...................................................................................................."
혜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날 오후에 혜미는 집 문을 나서고 있다. 아주 단정한 복장으로 비행을 위해 집을 나서고 있다.
통증은 남아 있지만 지난 달에도 동료와 근무를 교대한 적이 있다. 비행 전 브리핑에 승무원들은 반드시 참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행출발 세 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제 몰고 나갔던 차는 재성오빠가 처리해 주겠다고 했었고 아빠는 내가 비행을 간 사이에 출장에서 돌아올 것이다. 무리는
하지 말자. 오늘은 택시를 타고 나가서 공항리무진을 타면 돼. 혜미가 칵트를 끌고 발걸음을 서두르려는 순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종태의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
"월차를 냈어...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종태가 말을 걸어온다. 혜미는 고개를 숙이고선 종태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 한다.
"잠시만요!...................................................................................."
종태가 자신을 부른다.
"오늘은 내가 바래다줄께요... 공항까지... 차를 가지고 왔으니까......................................."
혜미가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돌리고 서 있다. 종태가 혜미의 곁으로 다가선다.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꼭 그래주고 싶은데......................................"
혜미가 말이 없다.
"부탁해요..............................................................................."
종태가 말하며 혜미의 칵트 손잡이를 손으로 잡는다.
"휴우......................................................................................"
혜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내 쉬어진다. 칵트를 건네주며 종태의 요구에 응했다. 차가 공항을 향해 움직인다. 차 속의
두 사람은 어색하다. 종태는 아무 말이 없이 운전대를 놀리고 있고 혜미는 오른팔로 턱을 받친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창 밖의 풍경들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종태가 살짝 눈을 돌려 유니폼을 입은 혜미의 모습을 훔쳐 보았다.
혜미는 자신에게 와 닿는 종태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그냥 묵묵히 창 밖만 내다보며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색함은 어쩔
수가 없다. 성욱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성욱이 종태씨를 보냈을까. 그런것 같진 않은데라고 혜미는 생각하고
있었다.
"성욱이 일은 걱정 말아요..................................................................."
종태의 말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혜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운전대를 놀리고 있는 종태의 얼굴을 바라본다.
종태는 이제 정면만 응시하면서 운전대를 놀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하고 혜미가 생각한다. 그런 혜미의 맘을
이해한다는 듯이 종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성욱이는... 혜미씨한테 어쩌지 못할거에요... 병원에서 치료하면서... 성욱이가 갈갈이 날뛰었어요... 성욱이... 부모님도
달려오셨고... 나 성욱이랑 다투었어요... 혜미 씨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나... 혜미씨도 잘 알다시피
나... 성욱이 녀석의 꼬붕이잖아요... 나... 어려서부터 성욱이랑 친하게 지냈지만... 나... 성욱이 녀석의 친구 아니에요...
나... 성욱이 녀석한테 충성 다 바치는 충실한 꼬붕이었습니다.........................................."
종태의 말이 이어졌다.
"나... 성욱이한테 그동안 빌붙어 지냈죠... 내가...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그 놈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알아서
기었어요... 그게 나한테 유리할 거 같아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접고 그렇게 알아서 기었어요... 혹시... 알아요?... 나중에
어떻게 잘 풀리면... 그 놈 덕분에 나한테도 콩고물이 좀 떨어질지도... 그 콩고물에 몸 한번 묻혀보고 싶어서 그렇게.....
혜미 씨도 잘 알다시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러기가 싫어졌어요............................."
혜미가 어느 새 다시 차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마구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에 들려오는 종태의 이야기에는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성욱이 녀석 따라 다니면서 추잡한 짓 많이 했습니다... 그 놈 하자는거 그대로 다 따라 하고... 어떨 땐 제가 먼저 나서서...
미쳐 설치기도 했었죠... 덕분에... 그 놈 생각... 그 놈 성격... 그 놈 하고 다니는 짓거리를 일거수 일투족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미래에 떨어질 콩고물 기대하면서 움츠리고 살았죠... 혜미씨 심정 이해해요... 혜미씨
왜 그랬는지 이해하고도 남아요... 사실... 그것 만으로도 부족할 정도죠... 우리가 혜미 씨 그렇게 만든 겁니다... 우리가
그런식으로 혜미 씨를 궁지에 몰아 넣었어요... 갈갈이 날뛰는 그 놈한테 말했어요... 혜미씨 건드리지 말라고... 건드렸다간
내가 가만히 안 있겠다... 성욱이 놈 어떤 인간말종 같은짓 하는지 내가 다 아니까... 그 놈 비리 다 아니까... 그 놈 약물에...
더구나... 옭아 넣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방법은 많으니까요... 성욱이 놈은 그런거 감당 못해요... 그런거 감당
할 수 있을만큼 대가 쎈 놈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세상이 자기 것처럼 떠들어대도... 사실은 나약하고 비겁한 놈이죠...
겁쟁입니다... 남의 마음에 대못 푹푹 찔러 대는 짓은 잘하지만... 자기 손톱에 가시 하나 박히는 거 못견디고... 아파 하는
그런 놈입니다... 자기가 감당 못할 망신거리 두려워하는 놈입니다... 그 놈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쉬쉬하는 대신
혜미씨 못건드리게 할 겁니다... 그 놈도 움찔했어요... 그놈 부모님도 저더러 뭐라고 하셨지만... 이젠 겁나는거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 인간들은 혜미씨 포기할거에요... 어차피 그 사람들이야... 혜미씨가 없어도 상관은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안그랬다간 그 놈이나 나나 끝장입니다... 이젠.................................................."
혜미가 조용히 종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약속할께요... 혜미 씨한테 제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건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 놈은 혜미 씨 포기할거고... 앞으로도
못건드립니다... 제가... 못건드리게 할께요... 혜미씨 지켜드릴께요... 자격은 없지만... 그건 할 수 있습니다... 전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전 더이상 아무것도 잃어버릴게 없는 놈이니까요..............................................."
종태가 잠시 말을 끊었다.
"미안... 담배 한대만 필께요..............................................................."
담배를 한대 꺼내서 입에 물고 운전을 계속 했다.
"혜미씨를 위하는 마지막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눈이 멀어서 미친 짓을 했었죠... 양심도 영혼도 어디론가 내팽겨치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용기가 없었던 거죠... 이젠
되찾아 와야 할 거 같아요.............................................................."
"................................................................................................"
"혜미씨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좋아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날마다 혜미씨 모습 혼자서 떠올려보면서
미친 짓 하곤 했습니다... 혜미 씨 옆에 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서럽고 분해서 성질을 부렸죠... 많이 울었죠... 술도
마셨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어요..............................................."
"................................................................................................"
"성욱이 놈이 혜미씨한테 막 대하는거 보고 참을 수 없었어요... 성욱이 놈한테서 혜미 씨 빼앗아오고 싶었어요... 혜미씨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어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껴안고 싶었어요... 날마다 입 맞추고 싶었어요... 혜미씨만 가질
수 있다면... 내가... 혜미씨만 가질 수만 있다면... 세상을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랑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 부질 없는 착각일 뿐이었어요... 결국 나도... 나도 성욱이랑 똑같은 놈이었어요... 더한
놈이었을 뿐입니다............................................................................."
혜미는 종태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히 귀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혜미 씨한테 몹쓸 짓을 했어요...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했어요...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목숨을 내 놓는다 해도 결국 변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거 다 압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속이진 않겠어요... 태어나서...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해 본적이
없습니다... 태어나서 누군가를 그토록 가까이 하면서도 그리워 해본 적은 없습니다... 혜미씨를 놔줘야 해요... 성욱이 놈이
혜미씨 포기하도록 만들고... 앞으로도 두번다시 얼씬 못하도록 만드는거...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게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해요..........................................."
차가 어느덧 공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야외 주차장으로... 세워주세요.............................................................."
혜미가 창 밖을 내다보며, 종태에게 말을 건넨다. 종태는 말없이 야외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공항 건물이 마주 보이는 야외
주차장의 한 켠에 아주 서서히 차를 세웠다. 먼저 차에서 내렸고 혜미의 칵트와 가방을 꺼내 주었다. 혜미는 차에서 내려서
칵트손잡이를 쥐었다. 종태가 혜미의 곁에 서서 함께 공항 쪽으로 잠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잇는다.
"잘... 다녀오세요... 몸 건강히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저도 성욱이도 혜미씨 앞에 두번
다시 나타나진 않을 겁니다... 전 영원히... 혜미씨 앞에 죄인이 되어 참회하며 살겁니다... 먼 훗날이나마... 정말로 언젠가
먼 훗날이라도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그때 웃으면서 인사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손 내밀지 않겠습니다...
잘가요... 혜미 씨....................................................................."
혜미가 묵묵히 카트를 쥐고 몸을 돌려 공항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종태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가는 혜미의 뒷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몇걸음 걷던 혜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끌고있던 칵트에 가방을 얹고 세우더니 혜미가 몸을 되
돌렸다. 그리고 잠시동안 종태를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움직여 종태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혜미의 모습이 커다랗게 느껴진다. 그 커다랗게 느껴지는 이미지가 서서히 종태의 앞에 다가섰다. 혜미가 종태 앞에 서더니
고개를 들어 키가 큰 종태의 얼굴을 바라본다. 천천히 오른 손을 올려 종태의 왼쪽 뺨에 닿더니 아주 슬며시 부드러운 손길로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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