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들의 행진곡 - 4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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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친절을 베푼다는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태수가 편해?"
"네"
"그애가 말하는게 꼭 애늙은이같지?"
"어른스럽고 좋잖아요"
"내친구도 그렇고 다른사람들도 그애가 좀 어렵다 그러는데 유진이학생은 안그래?"
"저는 안그런데요... 아주머니는 태수가 어려우세요?"
"그럴때가 있어"
그말을 듣고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에게 들으니까 태수아버님이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그러데요"
"응"
"아주머니가 계셨어도 태수가 일찍부터 집안에 하나뿐인 남자로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심리적인 부담을 가졌을 거에요.....
저는 그런 태수가 이해되요"
엄마로서 아버지없는 태수를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던 혜영은 크게 수궁이 갔다. 더군다나 그렇게 생각하는 유진이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자식은 원래 어렵잖아요... 하지만 태수가 아주머니를 많이 생각하고 있으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유진이학생은 어떻게 그리 잘알아?"
"저번에 태수에게 말한적이 있었는데 저도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와 단둘이 산적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아버님이 재혼하셨어?"
"네... 하지만 저의 아빠도 아직까지 저를 어려워 하세요... 새엄마와 재혼하시기전에는 저만 바라보고 사셨겠고 또한 제가 상처받을까봐
많이 조심하셔서 그러신가봐요"
혜영은 바로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에 어두워진 유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어머님과는 사이가 좋니?"
"서로 불편하죠...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내요... 제가 속이 좁아서 새엄마가 우리엄마의 자리를 뺐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거야 당연히 그럴수가 있지"
"그렇지만 어쨋든 저와 인연을 맺으신 분이잖아요... 관계를 좋게 할려고 해도 엄마가 생각나서 뜻대로 잘 안되네요"
평소 유진을 좋은쪽으로 아니면 안좋게 생각하던 혜영은 슬프게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자 연민의 정이 생겼다. 그래서 저도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죄책감을 갖지마..... 유진이학생이 나중에 결혼한후에 혼자되실 아버님을 돌보아 드릴 분이 있다는것은 다행한 일이잖아.....
유진이학생의 본성이 착하니까 시간이 흐르면 가족간이 화목해 질거야"
그녀의 손을 보고있던 유진이 고개를 들자 뜻밖에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혜영은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조용히 옆에 있는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보니 유진이학생과 태수가 닮은점들이 많은거 같네"
그말을 듣자 휴지로 눈을 훔치던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는데 별안간 문이 열리면서 태수가 들어왔다.
"엄마, 저 왔어요... 어? 누나도 있었네요?"
혜영은 얼굴을 돌리지않는 유진을 보자 급히 일어나서 태수에게로 갔다.
"포장지가 떨어졌으니까 이돈 가지고 가서 사와라... 급한 일 아니니까 천천히 와도 돼"
어리둥절하던 태수는 혜영이 굳은 얼굴로 응시하자 얼른 돈을 받아들고 쫓겨나듯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로 들어오자
유진은 붉어진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괜히 저때문에 태수가 심부름을 하네요"
"괜찮아... 어차피 포장지가 필요했었거든"
"가끔가다가 아주머니와 태수가 함께 있는걸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해요"
"뭐가?"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진정한 가족같아서요"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닫으셔야죠? 그만 가볼게요... 저에게 좋은 말씀 해주신거 감사드려요"
"내가 무슨 말을 해줬다고... 이 세상에는 유진이학생 혼자만 있는게 아니니까 밝게 살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던 유진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저에게 따듯하게 말씀을 해주신 분은 아주머니가 처음이신거 같애요"
창문으로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혜영에게는 그녀가 마지막 말을 했을때 무언가 절실해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유진이 혜영의 눈에는 태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태수는 엄마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까 책방에 들어갔었을때는 뜻밖에 유진이 있는걸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엄마가 마치 빨리 나가지 않으면 가만 안놔두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봐서 영문도 모르는채 허겁지겁 나와야 했었다. 한동안 그의 눈치를 살피듯이 행동하던 엄마가 갑자기 그런식으로 나오자 놀라움과
궁금증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책방에 들어갔었을때는 유진은 이미 없었고 엄마는 아무일도 없다는듯이 행동했었다.
그녀가 아무말을 안하길래 태수도 잠자코 있었지만 그당시의 침울하게 보였던 분위기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옆에서 엄마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듯이 평소처럼 조용히 걷고 있었다.
"엄마"
"왜?"
"아까 유진이누나와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순간 엄마에게는 알수없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지나갔으나 곧 평범한 인상으로 변했다.
"아무일도 없었어... 유진이학생이 사과를 사왔길래 같이 먹은거 뿐이야"
"그런데 왜 저를 그렇게 급히 내보내셨어요?"
"네가 온김에 잊어버리기전에 포장지를 사둘려고 그랬던거야"
"유진이누나는 좀 이상하게 보이던데요... 혹시 엄마가 뭐라고 그러셨어요?"
"왜? 내가 그애에게 야단이나 쳤을까봐 걱정이 돼?"
"그런게 아니고요....."
"그냥 여자들만의 얘기를 하느라고 널 내보냈던거야"
"여자들만의 얘기가 뭔데요?"
그러자 엄마는 걸음을 멈추고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무슨 남자애가 호기심이 많니? 남자는 몰라도 되는 그런 얘기가 있어"
그말을 듣고 왠지모르게 쑥스러워진 태수는 할말이 없어져서 그저 머리만 긁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엄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남자들이 들으면 여자들이 부끄러워 하는 얘기가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해... 자꾸 그런걸 묻는다는것은 유진이학생에게 실례야...
알았지?"
어리둥절해진 태수는 애인처럼 팔짱을 끼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 엄마에게 이끌려 집으로 갔다.
기타교습이 없어서 모처럼 중학교동창들을 만났던 선규는 집에 갈려고 태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진이 바빠서 책방이나
볼려고 했던 태수도 선규가 같이 가자고 하도 바람을 넣는 통에 어쩔수없이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나갔다 오는 길이었다. 일요일에 엄마를
쉬게 해주지를 못해 미안했으나 그녀는 대단히 기뻐하며 얼른 갔다오라고 등을 떠밀기까지 하였다. 그동안 정신없이 생활에 바빴던
그들은 오래간만에 즐거운 시간들을 가져서 마음이 유쾌했었다. 만났던 친구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별안간 선규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저앞에 가시는 분 선생님 아니야?"
선규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어떤 여자가 양쪽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양손에 무거워보이는 짐들을 하나씩 들고 걷고 있었다.
"뒷모습을 보니 선생님 같기는 하다"
둘이 얼른 달려가서 쳐다보니 역시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어? 너희들이 여기는 왠일이니?"
선생님은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가 그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중학교동창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댁에 가시는 길이세요?"
"응... 시장에서 찬거리들을 사오는 길이거든"
그러자 선규와 태수는 선생님이 들고있는 짐들을 재빨리 하나씩 뺏어들었다.
"저희가 댁까지 들어드릴게요"
"그럴 필요없어... 그냥 집에 가기나 해"
"선생님이 무거운걸 들고 가시는데 어떻게 모르는척을 해요?"
말도 안된다는 그들의 표정에 선생님은 포기했는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웃었다.
"고맙다... 그런데 내가 너희들 공부할 시간을 빼앗아 미안해서 어떡하지?"
"선생님 도와드리는건데 괜찮아요"
갑자기 나타난 그들때문에 놀랐는지 애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선규는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애들이에요? 귀엽네요"
"응... 남자애는 이름이 혁재고 올해 5살이야... 그리고 여자애는 희재고 3살이고"
형제나 친척이 없던 선규와 태수는 어린애들이 친숙하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애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서먹서먹한지 그들의 엄마뒤에 숨어서 얼굴들을 빼꼼 내밀고 선규와 태수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을 처음봐서 그런가봐... 날씨가 많이 더워졌지?"
"네... 그러네요"
태수옆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을 보던 선규는 이상하다는듯이 물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아이들의 아버지는 안계세요? 이럴때 선생님을 도와드렸으면 혼자 고생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사람은 회사일때문에 바빠서 공휴일에도 집에 없을때가 많아... 오늘도 회사에 나갔거든"
그말을 듣자 선규는 선생님의 아이들이 자신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학교에 계실때는 아이들은 뭐해요?"
"얘네들은 유치원이나 유아원에 갔다가 오후에 친구집이나 탁아소에 있어, 그럼 내가 퇴근할때 데리고 오지"
"아이들이 선생님을 많이 보고싶어 하겠네요"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들을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선규를 쳐다보았다.
"너희들도 그렇게 자랐니?"
"엄마가 대부분 옆에 있어줬지만 공부하시느라 바쁘셨거든요... 그래서 같이 안놀아준다고 제가 화를 내고 그랬데요"
"태수는?"
"저희 엄마는 저를 맡기실데가 없어서 일하러 나가실때 같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어머님들에 대한 옛추억들이 많겠구나"
어느덧 그들은 선생님집에 도착해 있었다.
"잠깐 들어왔다 가라... 내가 시원한마실거 줄게"
"괜찮아요... 저희들이 들어가면 선생님이 힘드실텐데 그냥 가볼게요"
"그러지말고 들어와... 내가 미안해서 그래"
어떡해야 할지 서로 눈치를 보던 선규와 태수는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온 선생님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안방으로 사라졌다. 항상 바깥에서만 보던 선생님집을 이렇게 안에까지 들어와서
보니 선규는 기분이 이상했다. 거실을 둘러보니 꽤 사는 집 같았다.
"선생님남편이 돈을 많이 버시나봐... 너 선생님집에 들어와본거는 처음이지?"
"응... 신기하다"
그러다가 선규와 태수는 거실선반에 놓여있는 선생님가족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속에 있는 아이들을 보니 찍은지 오래되지 않은것 같았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선생님남편은 매우 똑똑하게 생겼다. 선생님남편을 한참동안 응시하던 선규는 거실한구석에 놓여있는 피아노로
다가갔다. 피아노위에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악보들을 훑어보던 선규는 태수를 돌아보며 웃었다.
"한곡조 뽑아봐... 네가 피아노치는거는 한번도 못들어 봤다"
그러자 태수는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직 누구한테 들려줄 실력은 아니야... 네기타실력이나 들어보자"
"유감스럽게도 이집에 기타가 없나보네... 있으면 한시간동안이나 들려줄텐데... 아마 돈주고도 못들어볼 연주일거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선규는 태수와 소파에 앉자 저쪽 방안에서 아이들이 호기심어린 얼굴들을 내밀고 쳐다보고 있었다. 선규가 앞에
놓인 테이블위를 살펴보니 아이들이 갖고 노는듯한 구슬들이 보였다. 구슬하나를 손에 쥐고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와봐... 내가 재미있는거 보여줄게"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선규는 그들에게 마술을 보여줬다. 선규의 손안에서 사라졌다다가 다시 나타나는 구슬을 보자 아이들은
입이 벌어지며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태수도 옆에서 신기하다는듯이 바라보았다.
"그런거는 언제 배웠냐?"
"어렸을때 마술책을 보고 배웠어... 내가 호기심많은거 잘 알잖냐"
"아이들이 널 잘 따른다"
"원래 동심의 눈은 선한 사람을 알아보는거야"
그말에 태수는 너털웃음을 짓고있는데 방안에서 선생님이 나왔다.
"많이 기다렸지? 쥬스와 과일이 있는데 괜찮겠니?"
"네"
선생님이 먹을것을 가져오자 태수는 포크로 과일을 찍어 그녀에게 줬다.
"선생님 먼저 드세요"
"그래... 많이 먹어라"
그러는 선생님은 선규가 찍어주는 과일을 옆어서 맛있게 먹은 아이들을 신기하듯이 쳐다보았다.
"선규야, 너 어린애들을 좋아하니?"
"그런가봐요... 원래 어린애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얘네들을 보니까 귀엽네요"
"주위에 애들을 가진 친척도 없어?"
"네... 자주 만나지를 못해서요... 저한테는 태수와 태수어머님이 친척이에요"
선생님이 얼굴을 돌리자 태수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선규와 마찬가지에요"
"어쨋든 신기하다... 낯을 잘 가리는 애들인데 선규옆에 붙어있네"
"저도 선규한테 이런면이 있을줄은 몰랐어요"
함께 웃으면서 과일을 먹던 선규는 선생님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피아노를 전공하셨어요?"
"응... 그랬는데 음악선생님이 되서 다른 악기들도 이것저것 배웠지"
그말을 듣던 태수는 유진이가 생각났다.
"피아노를 전공하면 학원선생님 같은게 될 장래가 좋나요?"
"다른 악기들에 비하면 그렇지..... 아이들이 많이 배우거든..... 피아노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손가락에 힘도 길러주기 때문에 부모들이
선호하는 악기야"
"태수가 요즘 피아노 전공하는 누나한테 배우고 있어요"
"그래?"
그러자 태수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을에 있을 음악시험때문에 아는 누나가 가르쳐주고 있어요"
"벌써 한단 말이야? 다른애들은 보통 여름방학때부터 시작하던데"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연습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리고 일찍 시작하면 시간도 넉넉해서 좋잖아요"
"곡은 정했니?"
"네... 쇼팽의 "이별의 곡"이요"
"피아노 배웠었어?... 안그랬으면 그거 치기가 꽤 어려울텐데"
"배운적은 없어요... 그래서 지금 많이 애를 먹고 있어요"
"무슨 대단한 피아니스트처럼 연주할 필요는 없어... 박자와 음만 정확히 맞으면 되거든"
"네"
그리고는 선생님은 선규를 돌아보았다.
"선규도 연습하니?"
"네. 전 기타를 칠거에요"
"무슨곡으로 할건데?"
""카바티나"요"
"영화,"디어헌터"에 나왔던 곡?"
"네... 영화음악인데 괜찮죠?"
"그럼... 그것도 클래식음악인데... 연습은 잘 되니?"
"이제는 그럭저럭 쳐요"
선생님은 그들을 보며 흐믓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중요과목들만 공부해서 다른 과목들은 가볍게 여기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열심히 한다니 기분이 좋네"
"담임선생님이 음악선생님인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그의 말에 웃음을 짓는 선생님을 보며 선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작곡 하실줄 아세요?"
"학교다닐때 몇번 했었어... 그런데 그건 왜?"
"저기, 선생님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저에게 작곡하는법을 가르쳐 주실수 있으세요?"
"너, 커서 음악할려고 그러니?"
"그런건 아니고요... 그냥 기타를 치니까 재미가 붙어서 그래요... 배워두면 나쁠거는 없잖아요"
"가르쳐줄수는 있다만 네어머님이 아신다면 공부를 소흘히 한다고 안좋아 하실텐데"
"저희엄마는 제가 하고싶은것이 있으면 그렇게 반대하시지는 않으세요... 그리고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그럼 공부에 지장이 없다면 어머님의 허락을 받고 방학때 우리집에 와... 나는 음악을 가르쳐서 보충수업이 없거든... 그래서 방학때는
보통 집에 있어"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들은 잠시 더 얘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이 버스정류장까지 나오겠다는걸 간신히 만류한 후 골목을 나오던 태수는
선규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선생님이 편한가보다... 학기초에는 저승사자 보듯이 하더니만"
"그거야 그일때문에 그런거고... 자꾸 뵈니까 정도 있어보이시고 좋더라"
그러는 선규는 걸음을 멈추고 선생님집에서 조금 떨어진 집을 가리켰다.
"바로 저집이야"
"뭐가?"
"내가 그소리 들었던 집... 그리고 나오다가 바로 이자리에서 선생님과 마주쳤었고"
그러자 태수는 웃음을 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칭 선하다는 사람이 왜 그랬냐?"
"선한 사람도 호기심과 본능이 있는거란다"
"이제는 그런소리 안듣지?"
"내가 미쳤냐?"
생각도 하기싫다는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선규는 태수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은 선규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부하기도 바빴고 신문배달과 기타를 연습하는라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엄마도 허락을
해주어서 가끔가다 선생님집에 가서 작곡을 배웠다. 아이들과도 친해져 같이 놀아주는 선규에게 선생님은 학교에서와는 달리 매우
다정하고 친절히 대해주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선생님에게 따듯한 대우까지 받는 선규는 어느때보다 무척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대금을 받을려고 지난 겨울에 섹스장면을 보았던 여자의 집에 갔다.
여자는 선규에게 항상 웃으며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어서 그도 그집에 가는것을 다른 집들보다는 어려워하고 있지를 않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모를 지나칠정도의 친절때문에 그의 마음한구석에는 불편함도 없지않아 있었다. 오늘도 여자는 어김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선규를
맞아주었다. 그녀가 입고있는 시원하게 보이는 나시는 가느다란 팔과 관능적으로 보이는 어깨선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돈을 받고
영수증을 끊어주는 선규에게 여자는 야릇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규야, 요즘 바쁘니? 방학이잖아"
"공부도 해야하고 할게 있어서 좀 바빠요"
"혹시 이번 토요일 점심때 시간 있니?"
"왜요?"
"집안에서 뭐를 옮길게 있는데 혼자 하기가 벅차서 그래"
"혼자 사세요?"
"응"
선규는 여자를 살펴보았으나 이상하게 보이는 눈웃음을 제외하고는 얼굴이 순수하게 부탁하는걸로 보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께서 제가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할게요... 옮길게 많으면 친구도 데려올까요?"
"아니... 너만으로 충분할거 같애"
"그럼 토요일 점심때 찾아올게요"
그러자 여자는 별안간 선규앞에 바짝 서더니 발꿈치를 들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아주머니가 뭐니? 누나라고 불러"
그리고는 여전히 눈웃음을 치며 그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선규는 온몸이 경직이 되어 자리를 뜰줄을
몰랐다. 여자에게서 풍겼던 진한 향수냄새와 달콤한 목소리가 어찌나 자극적이었는지 그의 성기는 어느새 발기되어 있었다. 한참후에야
그걸 발견한 선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정말 이상한 여자야. 저나이에 왜 저러지? 그나저나 토요일에 와야 하나? 괜히 오겠다고 대답을 한거 같네] 마음같아서는 다시 돌아가서
그가 한말을 취소하고 싶었으나 변명도 생각나지가 않았고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설마 아무일은 없겠지. 내가 지나치게 과민하는걸지도 몰라]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성기를 진정시킨 선규는 요금을 받을 다음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책방에 있던 혜영은 유진이 들어와서 도시락 상자들을 내려놓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뭐니?"
"제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왔거든요... 한번 드셔보세요"
"어디 놀러갔다 왔니?"
"아니요... 그냥 아주머니께 드릴려고 만든거에요"
"나에게?"
다시한번 놀란 혜영은 도시락안을 들여다보았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샌드위치들은 정갈하고 매우 맛있게 보였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유진은 가지고 온 음료수를 꺼내며 샌드위치를 권했다.
"드셔보세요... 날씨도 더워 입맛이 없으실거 아니에요?"
"그..그래... 고맙게 먹겠다만....."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니 유진이 직접 만들었는지 썰어져 있는 야채들과 고기들이 소스와 섞여 있었다. 한입을 먹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맛있네... 요리솜씨가 좋은가보지?"
"정말 맛있어요?"
얼굴에 기쁨과 조바심이 가득 담긴 유진은 혜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빵안에 들어있는것들은 유진이가 직접 만든거야?"
"네... 마요네즈도 제가 만들었어요. 진짜 괜찮아요?"
"응... 이런것들도 만들줄 알고 대단하네"
혜영이 진실로 감탄을 하며 말하자 유진은 마치 합격을 받은것처럼 몹시 좋아했다. 그동안 몇번 더 만나서 얘기를 나눈 결과 서로 마음이
통하는것을 발견했고 더욱 친밀해졌다. 그래서 혜영은 언제부터인가 유진이라고 부르며 편하게 대했고 유진도 엄마와 대화를 나누듯이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얘기하게 되었다.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하나보지?"
"옛날에는 그랬었는데 요즘은 잘 안그래요"
"왜? 새엄마가 있어서?"
"네... 부엌에 들어가기가 좀 불편하거든요"
"그냥 들어가서 요리를 하는건데 어때?"
"재혼하기전에는 아빠가 제가 해드린 음식을 드시면 좋아하셨는데 결혼하시고 나서 식성도 바뀌시고 새엄마가 해드리는 요리만 찾으셔서
자연히 저도 하고싶지가 않게 되더라고요... 제가 너무 어린애처럼 굴죠?"
"그거야 딸입장에서 보면 그럴수도 있지... 새엄마가 성격이 안좋으시니?"
"그런거는 아닌데 벌써 몇년이 지났는데도 서로 불편하고 어색해 해요... 아마 서로가 잘 안맞나봐요"
"네아버님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말씀이 없으시고?"
"새엄마나 제가 겉으로는 내색을 안하니까 밖에서 일하시는 아빠는 모르시죠... 원래 남자들이 그런거에는 눈치가 느리잖아요"
쓸쓸해 보이는 유진의 얼굴을 보자 혜영은 측은함이 들었고 새엄마라는 사람이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아빠가 재혼해서 애가
충격이 컸을텐데 새엄마라는 사람은 어른이 되서 그게 뭐냐?..... 애를 조금만 따듯하게 대해주면 좋아할텐데..... 재혼이라는게 정말
힘드는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진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아주머니, 저기, 어려운 부탁을 들여도 될까요?"
"뭔데?"
"제게 요리를 가르쳐 주실수 있으시겠어요?"
"요리?"
"네... 아직 할줄 아는게 별로 없거든요... 옆에서 맛을 봐줄 사람도 없고요"
"글쎄... 도와는 주고싶다만 나도 요리를 썩 잘하는지는 않아"
"태수가 그러는데 아주머니 요리솜씨가 좋으시다고 하던데요"
그말에 혜영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태수가 도대체 바깥에서 무슨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거야?]
"그애는 워낙 내음식에 입이 길들여져서 그래.. 아무래도 새엄마한테 배우는게 좋지 않을까? 그런 기회에 서로 가까워 질수도 있잖아"
그러자 유진은 침울하고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을 본 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정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 줄게.. 그런데 나도 솜씨가 별로여서 남의 귀한집 딸을 망치는거는 아닌지 모르겠네"
그말을 듣고 유진은 금새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에요... 배울곳이 없었는데 아주머니께서 가르쳐 주신다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줄 몰라요..... 배운것을 요리해서 가져올테니
아주머니께서는 제가 잘했는지를 봐주세요"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요리를 배울려는거는 나중에 신랑될 사람한테 해줄려고 그러는거야?"
혜영의 말이 끝나자 유진은 홍조를 띄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그것도 그렇고 나중에 혼자 살지도 모르잖아요"
"집에서 독립할려고?"
"그냥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아마 결혼전까지는 아빠가 허락을 안해주실거에요"
"딸인데 나라도 그러겠다... 어쨋든 요새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던데 남자나 여자나 요리를 배워두면 좋지"
"태수도 요리를 해요?"
"응... 어렸을때부터 내뒤에서 봐와서 왠만한건 곧잘 해"
"아들이 상을 차려드리면 좋으시겠네요"
"그렇지도 않아.. 요즘세상에는 맞벌이부부가 많으니까 남자도 부엌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아들이 밥하는거는 보기 싫더라..
남들도 그렇다하니 엄마마음이 다 그런가봐"
유진과 함께 웃던 혜영은 책방창문을 바라보다가 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얘기할때 나타나는걸 보니 쟤는 양반되기가 틀렸나보다"
유진은 무슨 말인가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문이 열리며 태수가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본 그는 멈짓했으나 유진이 웃으면서 반겼다.
"어서와... 이리와서 이거 먹어"
태수가 이번에는 혜영을 바라보자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이리와... 유진이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지고 왔어"
그제서야 어설픈 웃음을 짓는 태수는 다가와서 유진이가 주는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었다.
"이거 진짜 누나가 만들었어요? 정말 맛있네요"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하겠다"
혜영은 태수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음료수를 주는 유진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을 친절히 챙겨주는 그녀를 보니 예전에 느꼈던
질투심은 안나고 묘한 감정이 생겼다. 태수또래의 여자애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보기는 유진이 처음이었다. 말로만 듣던 요즘아이들과는
달리 유진은 혜영에게 세대차이를 느끼게 해주지를 않았다. 오히려 혜영나이의 어른들보다 더 차분하고 속이 깊어 보여 보면 볼수록 좋은
인상과 호감을 가져다 주었다.
[나이만 많지않으면 태수의 배필감으로 안성맞춤인데..... 하기야 나이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집안들이 맞지가 않아서 힘들겠지..... 저런
며느리감이 또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하자 저도모르게 아쉬움이 들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샌드위치를
먹던 태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들을 유진도 몰래 조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태수는 죄지은 사람처럼 엄마뒤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다. 아까 어둡게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또 화가 났나싶어 조마조마했고
유진이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그냥 조용히 먹지 왜 그랬냐?... 저번에 엄마가 화나셨던걸 보니 오래 가시던데
어떡하지?] 지난 몇주동안 책방에서 엄마와 얘기를 나누는 유진의 모습이 부쩍 눈에 자주 띄었다. 처음에는 그러는 유진을 보고 엄마가
무슨 야단을 쳤던건 아니구나라고 생각되어 안심했었으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을 보고 지난번에 엄마가 말했던 여자들만의
얘기를 하는줄 알고 일부러 그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그가 들어갈때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유진도 그렇고 엄마도 이상했다.
평소에는 그의 눈치를 살피거나 수줍으면서도 부드러운 얼굴로 대했던 엄마는 그때만은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떤때는 엄마가 마치
부모처럼 유진을 보호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때도 있었다. 생각을 해보니 엄마와 유진이를 웃으면서 반겨주었던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여자들이 원래 그러나?] 하지만 지금의 엄마심정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유진과 다정하게 있었던거 때문에 혹시
엄마가 다시 질투가 났나해서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엄마"
"응?"
"저기, 화가 나신건 아니시죠?"
"내가 왜 화가 나?"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쳐다보는 엄마를 보고 태수는 어느정도 안도가 되었으나 그래도 마음한구석에서는 일말의 불안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엄마가 화나지 않았다는걸 확인 해봐야겠는데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던 태수는 저도모르게
입안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엄마, 제게 업히실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저에게 업혀보신지도 오래 되셨잖아요"
"됐어... 날씨도 더운데 힘들게 뭐 그러니? 그냥 가자"
하지만 태수는 엄마를 업어줘야 완전히 안심이 될거 같아서 그녀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시지 마시고 업히세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요... 더운 날씨때문에 많이 지쳐 계실거 아니에요"
"그럼.. 그래볼까?"
잠시 망설이던 엄마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업혔다. 그녀를 업고 걷는 태수는 그제서야 무거웠던 가슴이 내려앉았고 또한 오래간만에
등에서 엄마의 뭉클하고 부드러운 육체가 느껴지니 기분이 좋기도 하였다.
"엄마, 유진이누나와 요새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자주 나누세요? 꼭 비밀얘기를 하는것 같아요"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거야"
"누나와 얘기하면 좋으세요?"
"응... 젊은애들은 항상 너나 선규같은 머슴아들과 얘기를 나눴는데 유진이같은 여자애와 말을 하니까 재미있고 좋더라"
"그래요? 잘 됐네요"
웃던 엄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의 얼굴에 입을 가까이 대며 진지하게 말했다.
"태수야, 난 네가 결혼을 일찍 했으면 좋겠다"
그러자 태수는 걸음을 멈추고 심각해진 엄마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요?"
"네가 좋은 여자를 만나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 내마음이 안심이 될거 같애"
"저는 엄마와 이렇게 함께 사는게 좋은데요"
"내가 네아내도 아닌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수는 없잖아... 정상적인 삶을 가져야지"
한참동안 엄마를 쳐다보던 태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저한테는 엄마만 있으면 되요"
"....."
"하지만 엄마가 그걸 원하시면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할게요... 그런데 엄마같은 여자를 만날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당연히 나보다 더 나은 여자를 만나야지"
그의 침울한 목소리를 듣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서로 아무말없이 모퉁이를 도는데 별안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명숙과 마주쳤다.
"어?"
"....."
깜짝 놀라는 명숙을 보며 아들의 등에 업혀있는 혜영도 두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겁을 했다. 황급히 태수의 등에서 내려올려고 했으나 너무
놀란탓인지 숨도 제대로 못쉬며 온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태수도 많이 놀랐는지 그녀를 내려놓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친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창피하고 당황스러웠고 또한 명숙이 혹시 아들과의 관계를 눈치채지는 않았을까해서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놀라던 명숙은 곧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신기하다는 눈으로 혜영과 태수를 바라보았다.
"왠일이야? 아들에게 업혀오고"
"....."
태수는 곧 진정이 됐는지 얼른 인사를 하며 말했다.
"날씨가 더워서 엄마가 많이 힘들어 하세요... 그래서 제가 업어드리는거에요"
"몸이 안좋아?"
"아..아니... 좀 더위를 먹었나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던 명숙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야지... 이럴때는 밥을 많이 먹고 기운을 차려야돼"
"그런데 너는 어디 가는거니?"
"선규가 냉면먹고 싶다고 전화를 해서 그애를 만나러 가는길이야... 너도 같이 갈래?"
"아..아니... 됐어... 가서 맛있게 먹고 와"
"그래, 알았어"
그러더니 명숙은 다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이 업어주는건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니? 남들이 보면 애인한테 업힌줄 알겠다"
그소리에 혜영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그걸 보고 명숙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좋네... 나도 나중에 선규에게 업어달라고 해야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그래... 잘가"
"안녕히 가세요"
명숙은 여전히 신기한듯 웃음진 얼굴로 갸우뚱하더니 이윽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깊은 한숨이 나온 혜영은 아들의 어깨를
다급히 두들겼다.
"어서 날 내려놔... 그러게 안업힌다고 그랬었잖아"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태수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태연했다.
"당황하셨어요?"
"몰라... 얼마나 부끄러웠는줄 알아?"
"아줌마말씀대로 아들에게 업힌건데 어때요?"
"그래도 그렇지"
아직까지 가슴이 뛰는 혜영은 명숙이 사라진 모퉁이쪽을 쳐다보았다.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그럼요... 자식이 엄마를 업어주는거는 흔히 있는일이잖아요"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수가 있었냐?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깔은거 같애"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것도 아닌데 당황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당연하다는듯이 말하는 태수는 보고 혜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애인들처럼 보이나보지?"
그소리에 태수는 대답을 안하고 그저 히죽 웃기만 했다.
"그게 좋냐?"
"듣기는 나쁘지가 않은데요"
혜영은 그러는 태수가 어이가 없었으나 그녀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숙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것이 자꾸만
가슴에 걸렸다.
"어쨋든 선규엄마눈에 그런식으로 보였다니 앞으로 더욱 조심하자"
"네"
계속 싱글벙글거리는 태수를 보고 달아오른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있었던 혜영도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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