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게임 -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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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중앙의 대형 스크린 앞에 모인 게임 참여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물론, 3라운드 마지막 게임이기에 그 누구더라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꼭 참여자들의 긴장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서영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모르는 곳에서 불길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영이 보기에는 수영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거의 표정 변화가 없긴 했으나,
문득문득 보이는 6번 부부의 영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뭘까... 뭘까... 도대체... 이 불안함은...’ 서영은 자신의 남편인 민혁의 얼굴에서 불안함의 끝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아니, 누군가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는 듯 민혁의 얼굴은 굳어 있는 채로 좀처럼 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서영이 민혁에게 조심스레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대답 없는 민혁을 바라보며 서영은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하하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추행범과 피해자가 결정되었는데요? 투표에 앞서 피해자를 밝히고 추행범을 잡기 위한
약 30분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피해자는 스스로 밝히시죠?
대형 스크린에는 치킨 박이 등장을 했다. 그리고 치킨 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혁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알린 것이었다.
“접니다.”
민혁의 말이 끝나고 서영은 자신은 더 이상 투표권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수영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는
기권 규정의 경우가 아닌 이상 탈락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4라운드 진출은 거의 확정이었다.
- 하하하. 이번에는 1번 부부인 최민혁님과 김서영님이 피해자가 됐군요. 기권 규정의 경우 나오지 않는 이상 4라운드 진출이 확정이 됩니다. 미리 축하드릴까요? 하하하.
친절한 치킨 박이 민혁과 서영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서영은 치킨 박의 말을 들으며 5번 부부와
6번 부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가 추행범이지... 민혁씨가 피해자였다면... 수영이가 추행범은 아니었을 것이고... 혹 6번 부부인가?’
서영은 수영이 추행범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추행범으로 결정이 되었다면 굳이 민혁을
피해자로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영이 생각하기에 추행범 팀은 5번 부부 혹은 6번 부부 둘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6번 부부일 것 같아... 영호라는 남자가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보면... 아니... 아닌가...
5번 부부를 탈락시키자는 일종의 무언의 사인 같은 걸까...’
서영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자신이 투표권이 없었기에 이제는 3번, 5번, 6번 부부의 일대일대일의 싸움이 된 것이었다.
투표권이 있는 세 부부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면, 서로 한 표씩 받고 전원 탈락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영은 불안한
마음이 점점 가속화 되어가고 있었다. 수영과 함께 4라운드 동반 진출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야. 추행범을 잡을 수 밖 에...’ 서영은 포지션을 확실히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투표권이
없었기에 수영을 살려내려면 반드시 추행범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5번 부부나 6번 부부나 믿을 수 없음에는
매한가지였다.
“자... 자기야... 누구야? 추행범은... 자기는 알고 있지?”
급한 마음에 서영이 민혁에게 추행범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리고 모든 참여자들이 민혁의 입에 집중했다.
민혁의 말 한 마디에 추행범이 결정이 될 것이고, 그것이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피해자에게 추행범으로
낙인찍히면 마지막 게임에서는 상당히 불리할 수 밖 에 없었다. 표가 고작 3표 밖에 되지 않았다.
“... 알고 있기는 한데...”
“그래?”
민혁의 대답을 들은 서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추행범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수영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누구야? 말해 봐.”
서영이 입을 닫고 있는 민혁을 재촉했다. 그리고 민혁은 서영 대신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민혁이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영호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추행범이... 수영이었군..’ 영호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힐 정도로 예상이 잘 들어맞자,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뿌듯함에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지만, 또한 스스로 위기를 탈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영호는 이제 확신이 들었다.
‘난 무조건 4라운드 진출한다.’ 영호의 흔들기가 성공하고 있었다. 민혁이 말없이 수영을 바라보자 서영은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마?”
서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민혁으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민혁은 서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아. 수영이가 추행범이야.”
민혁의 입에서 수영이 추행범이라는 사실이 확인이 되었고, 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쳤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비단 서영뿐만 아니라 수영이가 추행범이라는 사실에 모든 참여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민혁의 뜻은 완고했다.
“맞아. 그 년이 배신을 했어!”
말은 못하고 듣지도 못했지만, 명진은 현재 분위기가 어떠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민혁을 향해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수영이 추행범이 아니라며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니라고? 씨발. 아니라고? 니 좆같은 마누라가 우리를 배신했단 말이야!”
민혁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서영은 당장에라도 귀라도 막고 싶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멍하니 소리치는 민혁만을
바라봐야 했다.
“난 봤어! 다 봤단 말이야! 지난밤에 화장실에서 수영이라는 년과 저기 영호라는 놈이 만나는 것을... 그리고 들었어! 서로
믿는다고 말했단 말이야!”
민혁이 서영에게 다시 한 번 소리를 쳤다. 서영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비록 알게 된지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영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 수영아...”
서영이 수영을 부르며 바라봤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긍정을 뜻했고,
마치 민혁의 말을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수영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 말 해봐.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해야지.”
서영이 처절하게 수영에게 애원을 하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서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영에게서의
시선을 돌려 영호를 쳐다보았다. 영호는 서영이 자신을 쳐다보자 씨익 웃어주었다.
“거 봐. 저 자식도 웃고 있잖아... 우리는 배신을 당한 거야. 탈락할 위험에 빠진 거라고!”
민혁의 말을 들은 서영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넋이라도 빠진 것처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수영이가 그럴 리가...”
“아직도 모르겠어? 왜 저들이 배신을 했는지? 여기 있는 사람... 아니 5번 부부 잘 들어!”
민혁은 모든 참여자들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더 이상 예의를 찾을 이유도 없었다. 민혁의 생각은 자신들이 마지막 게임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5번 부부를 공략해서 수영과 영호의 생각을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당신들이 계속 기권을 하니까... 3번 부부와 6번 부부가 기권 규정을 이용해서 우리 부부를 탈락 시키려고 해. 그러면
상금 칩이 10개나 되니까 말이야. 대신에 내가 당신부부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 저들이 기권을 할 때, 당신부부만
투표를 한다면... 홀로 4라운드 진출이 확정이 되지... 저 개같은놈년들과 함께 4라운드에 갈 필요 없잖아? 난 이대로
탈락해도 좋아. 대신에 저 개같은놈년들과 함께 죽을 거야... 알았어?”
민혁의 말에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두 손을 모았다.
“씨발... 이 상황에 또 기도야! 절대 기권 하면 안 돼. 투표를 하란 말이야!”
민혁의 말을 듣지 않는 5번 부부였고, 예상과는 다르게 영호의 입에서 하나의 제안이 흘러 나왔다.
“서로 함께 기권하면... 그 분도 좋아하시겠지요.”
말을 마친 영호가 입을 다시 닫았다. 물론, 영호는 기권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영 부부가 절대 기권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의 발언으로 민혁을 좀 더 자극시킬 수는 있었다.
“씨발 개자식아! 끝까지 장난질이야? 전부 기권시켜놓고 개 같은 니 새끼만 투표 하려고 하잖아. 안 그래? 내가 너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 새끼야!”
민혁의 거친 말이 이어졌고, 스크린 앞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 그런데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였다.
짝짝짝....
“재밌어. 아주... 좋은 시나리오였어.”
영호는 민혁을 조롱하고 있었다.
민혁은 그런 영호가 너무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러나 당장 영호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 그만... 해요.”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지금껏 고개만 숙이고 침묵을 했던 수영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수영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영이 정신을 차리고 수영에게 다가갔다.
“그... 그래... 수영이 진실을 말해... 진실을...”
서영은 수영의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지금까지 민혁과 영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모두 틀렸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제... 제가... 추행범... 맞아요.”
수영은 자신이 추행범이라고 밝혔고, 서영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왜 수영이가 피해자로 자신의 남편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거 봐! 맞잖아. 저 쌍년이... 추행범이라고... 우리를 배신한 거야.”
“추행범은... 맞는데... 다 이유가 있어요. 사정이 있어요. 민혁님이 생각하는 건.... 다 오해예요.”
“오해? 오해는 개뿔. 내가 봤다고 저 새끼랑 키스를 하는 것도...”
민혁의 말에 서영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놀라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협.... 협박을 당했어요... 그리고 제 반지를 가져갔단 말이에요.”
수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고, 서영은 즉시 수영의 손을 확인했다. 확실히 눈에는 수영이가 끼고 있어야 할 은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언니가 저를 살려주었듯이... 제가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세 번째 게임이 끝나면... 반지를
돌려준다고... 했어요.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수영이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서영은 수영의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영호가 수영을 협박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을거야 좆까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그 시간에 키스도 하고... 내가 믿을 것 같아? 처음부터 이상했어...
저 남편이라는 병신 새끼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면서... 너무 자연스럽잖아. 이게 말이 돼? 또 백혈병? 좆까라 씨발..
영수 새끼도 그런 구라를 깠었지. 난 죽어도 너희를 못 믿어.”
서영은 거친 민혁의 말에 반박을 할 힘도 없었다. 수영의 말을 믿긴 했지만, 서영은 남편인 민혁의 말도 무시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민혁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기에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난 안 믿어.”
“영호라는 남자가 웃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면 수영이 말이 사실이라는 거잖아!”
서영이 어렵게 민혁을 설득시켜보려고 하지만, 그 역시 실패로 끝이 났다.
“내가 모든 것을 밝혔으니... 저렇게 웃고 있는 거야!”
“그... 그게 아니야... 수영이를 믿어야 한다고...”
“난... 절대 혼자서는 탈락 안 할 거야.... 절대...”
“내... 내가 확인 시켜 줄게...”
서영이 마지막 힘을 내어서 영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협박 했어요? 도대체 왜!”
“난 협박을 한 적이 없는데....”
“반지 가져갔다면서요? 돌려줘요!”
“무슨 반지?”
영호는 철저하게 서영의 질문에 모른 체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민혁은 점점 더 분노에 빠졌다.
서영의 행동이 쓸데없는 짓임을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무엇때문에 수영이를 위해 이토록 행동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냥 와... 저 새끼랑 말을 해 봐야.... 그냥 오란 말이야!”
민혁이 서영에게 소리를 쳤다. 그리고 영호는 그런 민혁을 쳐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저... 저 새끼가...”
“훗.”
서영은 온통 머릿속이 복잡해져갔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 헷갈렸고, 무엇보다 영호가 왜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만드는지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바라는 것 하나는 수영 부부와 4라운드에 동반 진출하는 것 뿐 이었는데, 지금
으로서는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 하하하. 시간이 다 됐군요. 아주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이제 투표 해볼까요?
험악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깬 건 치킨 박의 웃음소리였다. 치킨 박이 세 번째 게임의 투표를 실시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투표권을 가진 세 부부는 묘한 심리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 미안해... 반지를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어...”
투표가 다가오자 수영이 명진의 눈앞에서 손짓과 더불어 소리 없는 대화를 시도했다. 입술모양만 가지고도 말을 알아듣는
명진은 수영의 뜻을 이해하고 괜찮다는 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6번... 6번 부부를 선택하겠어... 우리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 서영 언니에게 확인해주고 싶어...”
다시 한 번 명진은 수영의 뜻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자... 좋습니다. 그러면 3번 부부인 한명진님과 이수영님부터 투표를 시작해 볼까요? 하하하.
치킨 박의 말이 끝났고, 명진과 수영이 천천히 오른쪽에 있는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부부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으나, 그렇다고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또박또박 걸어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명진과 수영 부부의 투표를 시작으로 3라운드 마지막 게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면 최종적으로 4라운드 진출자가 정해질 것이었다. 투표권이 있는 세 쌍의 부부가 차례대로 투표를
마쳤다. 그리고 네 쌍의 모든 부부는 그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1번 부부이자 세 번째 게임의 피해자 팀이었던 민혁과 서영은 부부였지만, 현재의 모습은 사못 달랐다. 민혁은 탈락까지
각오하면서 수영과 영호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고, 서영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다. 많은 충격을 받은 서영은 온
몸에 힘이 없었지만, 오로지 수영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동반 진출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3번 부부인 명진과 수영의 표정은 침울 그 자체였다. 특히 수영의 마음속은 후회로 가득했다. 왜 영호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물론, 두 번째 게임에서는 서영 부부를 살리기 위해서 영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세 번째 게임은 달랐다. 명진에게 받은 아주 중요한 결혼반지이기는 했으나, 그 반지를 포기했다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차라리 서영의 말대로 추행범이 된 상황에서 5번 부부나 6번 부부를 피해자로 만들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아니었을 텐데... 수영은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은 투표를 마치고 아주 색다르게 변해 있었다. 시간만 나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 부부였지만,
지금은 차분한 표정으로 스크린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은 민석과 지민이었는데, 이상한 점은 아주
긴장된 상황에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분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투표 결과를 알고 있는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6번 부부인 영호와 효진은 여느 부부보다 가장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부부들은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서로 대화를 하며 때론 가벼운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영호는 자신의 4라운드
진출을 확신하고 있었고, 효진은 이런 영호를 굳건히 믿고 있었다. 영호가 효진과 대화를 하며 곁눈질로 부부들의 모습을
관찰했고, 자신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 5번 부부... 저 사람들 역시 사기꾼이었어... 별 거지 같은 컨셉을 잡아서... 따지고 보면 기도만 하는 예수쟁이 컨셉으로
3 게임 중 2 게임을 날로 먹었으니... 마지막 투표가 끝나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영호는 1번 부부와 3번 부부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만 보더라도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는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그러나 영호는 5번부부
에게서만큼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것도 관심이 있는 것처럼 기도만 하던 부부였지만, 3라운드 마지막 투표가
끝나자마자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동안 연기를 해왔다는 것이고,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5번 부부의
연기에 깜짝 속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아주 단순하게... 기도만 해서 4라운드에 진출이라니... 젠장. 대가리를 한참이나 굴린 내가 병신 같군... 후훗.’
영호의 생각은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은 경쟁자 부부에게 전혀 적이라는 경계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부부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싸우는 와중에도 5번 부부는 기도만 올렸을 뿐인데 무난하게 두 번의 게임을 아무
위기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그나마 영호는 중립을 지키는 듯, 중립을 지킬 것 같지 않은, 중립 같은 5번 부부를 또 다른
변수라 생각하며 주시해 왔다. 그리고 세 번째 게임의 투표가 끝난 후, 그 실체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미 투표는 끝나서 되돌릴 수도 없고... 5번 저 사람들을 탈락시킬 걸 그랬나...’ 영호도 5번 부부를 너무 간과한 것에
후회를 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 버렸다. ‘소리 없이 강한 사람들이다... 언젠가 다시 마주칠 수 있겠지. 그나마 3라운드
에서라도 실체를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후훗.’
영호는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을 또 다시 만날 것이라는 예감에 그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대형 스크린에는 치킨 박이 등장을 하였다.
- 하하하.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게임 결과 발표를 해야지요?
이제는 모든 참여자가 치킨 박의 말에 집중을 했다. 3라운드 마지막 결과가 그의 입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긴장된 순간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흥미가 있는 순간이었다.
- 그동안 흥미 있게 게임을 이끌어주신 여러분들 모두 4라운드에 진출 시키고 싶지만... 아쉽게도 규정상 그럴 수도 없고...
실제로 투표 결과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하하하. 그럼 먼저 4라운드 진출하는 부부를 호명해드리죠.
모든 참여자가 치킨 박의 말에 침을 삼켰다. 그리고 치킨 박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축하드립니다. 최민혁님, 김서영님 4라운드 진출하셨습니다. 하하하.
치킨 박의 입에서 민혁과 서영이 4라운드에 진출했음을 알렸다. 민혁은 그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벌떡 뛰며 환호를 했다.
아니, 환호라기보다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대폭발을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씨발. 난 살아남았어. 살아남았다고!”
민혁은 자신의 부부가 탈락 위기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표 직전에 기권 규정의 경우를 언급하며 5번 부부를 흔들어
버린 것이 4라운드 진출을 결정지었다고 생각했다. 민혁은 나머지 세 부부가 기권 규정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만든
상황이 매우 뿌듯했다. 그것 때문에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 여보... 우리 4라운드 진출했어. 진출했다니까!”
기쁜 민혁이 앉아 있는 서영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만, 서영은 오로지 수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영 역시 4라운드에 진출한
사실에 안심이 되긴 했지만, 수영 부부와 꼭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은 기뻐하기 이르다고 생각했다.
- 하하하. 매우 기쁘신가 보군요. 우리 섹스게임은 참여자들에게 이런 기쁨을 주기도 한답니다. 하하하. 민혁님이 환호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다 뿌듯하군요. 하하하. 좋습니다. 두 번째 4라운드 진출 팀을 말씀 드리죠.
민혁과 서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부들이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제발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기를 바라며, 치킨 박의 입에
집중을 했다.
- 축하드립니다. 김민석님, 황지민님 4라운드 진출입니다.
다음 4라운드 진출팀은 5번 부부였다. 민석과 지민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매우 환한 얼굴과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후 가볍게 포옹을 했다. 물론, 더 이상의 기도는 없었다.
- 하하하. 감사의 기도는 없나 보군요. 좋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 그것 역시 우리 섹스 게임의 묘미겠지요...
다 보여줄 이유가 없으니... 하하하.
이제 남은 부부는 3번 부부인 명진과 수영, 6번 부부인 영호와 효진이었다. 비교적 영호와 효진은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명진과 수영은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 부부를 바라보는 서영의 표정도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 이제 두 쌍의 부부만 남았군요. 하하하. 규정상 두 팀이 모두 탈락할 수도 있겠지요? 하하하.
만약 5번 부부가 기권을 하고, 3번 부부와 6번 부부가 서로에게 투표를 했다면, 두 쌍의 부부가 탈락하는 경우도 생길 수가
있었다. 치킨 박은 남은 두 쌍의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 하하하.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번 투표에서는 기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쌍의 부부가 남았으니... 말을 하지 않으셔도
알겠지요? 한 팀은 살아남고, 다른 한 팀은 루저 제도의 희생양이 되겠습니다. 그럼 최종 결과를 발표해야겠지요?
수영은 극도의 긴장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치킨 박을 통해 최종 결과는 들어야 했다. 수영은 꿋꿋하게 다리에 힘을 주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했다.
- 한명진님, 이수영님...
치킨 박의 입에서 3번 부부인 명진과 수영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영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서 수영이를 품에 안았다.
“돼... 됐어... 수영아... 함께 가는 거야.... 수고 했어... 정말....”
수영 역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루저가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완전히 자신의
몸을 서영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고... 고마워요... 언니... 믿어줘서...”
힘겹게 수영이 서영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보던 치킨 박이 한참이나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 하하하. 이거 참 머쓱하군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데...
수영을 안고 있는 서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킨 박의 다음 한 마디에 수영을 안은 채로 서영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 다시 말하지요. 하하하. 한명진님, 이수영님 당신들이 탈락입니다. 루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영호님과 강효진님 축하드립니다. 4라운드 진출입니다.
“아.... 안 돼!”
서영이 쓰러진 채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은 수영의 가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한 명진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명진과 수영은 이렇게 3라운드에서 탈락이 결정되었다.
- 투표 결과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요. 하하하. 물론, 그 사이에 명님과 수영님은 작별인사라도 하세요.
냉정한 치킨 박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참여자는 오열하고 있는 명진과 수영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 옆에서 서영 역시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수영을 붙잡고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 3번부부는 6번부부에게 투표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남은 5번부부와 6번부부가 3번 부부에게 투표를 했겠죠?
6번 부부가 한 표, 3번 부부가 두 표를 받았기에 최종 탈락자는 3번 부부가 되겠습니다. 하하하. 아참, 이번 3라운드 마지막
게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추행범이 잡혔습니다. 더불어 4라운드 진출하시는 모든 부부는 상금이 2개의 칩과 더불어
추행범을 잡았기에 1개의 칩을 더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총 3개의 칩을 상금으로 받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치킨 박은 탈락자인 명진과 수영의 사정을 봐 줄 생각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컴퍼니 직원들을 통해 루저가 된 명진과 수영을 떼어 놓은 후, 끌고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 안 돼!”
서영이 끝까지 수영의 몸을 붙잡았지만, 컴퍼니 직원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서영은 컴퍼니 직원들의 힘에 밀려, 다시
한 번 바닥에 쓰러져야 했다.
“자... 자기야.... 안 돼요. 안 돼.... 요. 한 번 만.... 안 돼....요. 우리가 이렇게 헤어... 질 수 없어요... 제발요... 부탁할게요.”
말을 할 수 있는 수영이 점점 멀어지는 명진을 향해 울부짖었다. 명진 역시 발버둥을 치며 수영에게 달려가려고 하지만,
자신도 끌려가는 상황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우우우... 우우욱.... 우우욱”
명진이 힘겹게 수영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지만, 고작 몇 미터 가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 직원들. 나가는 길에 두건 씌우는 거 잊으면 안 돼?
치킨 박이 다시 한 번 컴퍼니 직원에게 잔인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제대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명진과 수영은
참여자들의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서영은 수영이 끌려간 곳을 향해 계속해서 소리를 내지르지만, 당연히 대답을 할 사람은
없었다.
- 좋습니다. 항상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지요. 이 또한 인생이 아닐는지... 하하하.
치킨 박의 다시 말을 했지만, 참여자들 중 유일하게 서영만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민혁 역시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했기에 치킨 박의 말에 집중했다.
- 나가시기 전에 각 3개의 칩을 받으시면 됩니다. 하하하. 그리고 통로 끝에 철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검은 두건을 다시
쓰셔야 하니... 약간의 불편 감수하시길... 다음 4라운드 역시 저희 컴퍼니에서 개별 통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러면... 이상... 음?
“할... 말 있어요!”
치킨 박이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할 때, 서영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 아, 김서영님?
“수... 수영이는 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서영은 끌려 간 수영이가 걱정이 되었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아니면 최악의 상황으로 죽게 되는 것인지,
너무나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 하하하. 그 점에 대해서는 본 컴퍼니에서 말해주지 못합니다. 알고 싶으면, 직접 루저가 되어 보시던가... 아니면 우승을
하시던가... 하하하.
치킨 박은 서영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영은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하면... 수영 부부를 다시...”
- 패자부활전 같은 거 생각하시나 본데... 그런 건 없습니다. 루저는 루저가 될 뿐... 하하하.
치킨 박은 단호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서영은 깊은 좌절감에 빠져야 했다. 수영부부를 구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하하하. 김서영님이 이수영님을 매우 걱정하시는데... 꼭 걱정할 이유는 없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지요...
꼭 루저가 된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지요. 때론 루저가 또 다른 위너가 될 수도 있지요. 하하하.
치킨 박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기에 서영이 재차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수영 부부도... 다른 기회가...”
- 더 이상 답변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지금껏 서영과 치킨 박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혁이 입을 열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질문이 있소.”
- 이번에는 최민혁님이군요. 무슨 질문입니까?
“사실이오?”
- 무엇 말입니까?
“우리의 대화와 행동을 다 지켜봤지 않소? 수영이라는 여자애의 말과 행동이 모두 사실이었냐... 이 말이오.”
민혁은 착잡한 마음에 치킨 박에게 질문을 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는 못했다.
- 하하하. 우리 민혁님이 그토록 의심하시더니... 이제 마음에 좀 걸리시나 봅니다?
치킨 박의 말에 민혁의 가슴이 뜨끔 거렸다.
- 대답해드리지요. 하하하. 수영님의 말과 행동은 거짓이 없었답니다. 하하하. 명진님 역시 말을 하지도 못하고, 또한 듣지
못하며, 둘 사이에는 고작 20개월이 된 백혈병이 걸린 딸이 있지요. 또한 저쪽 영호님이 협박도 하셨습니다.
하하하. 참 재밌는 협박이었지요.
치킨 박에게서 진실이 흘러나오자 서영은 민혁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민혁은 아내의 원망어린 시선을 느끼며, 숨을 크게
내쉰 후, 말을 했다.
“... 정말... 이오?”
- 저, 치킨 박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털썩.... 모든 것을 스스로 망쳤다는 생각에 민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후, 스스로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씨발... 이런 병신같은 민혁아.... 씨발.... 씨이이이발!”
민혁의 자조섞인 외침이 로비를 울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영호가 한 마디 내뱉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말을 마친 영호는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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