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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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달려온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서 만드는 물거품 처럼 지선의 가슴속에는 항상 고독함이 물거품 처럼 일어나 있었다.
시계 추 처럼 집을 드나드는 남편에게 감정도 감각도 없이 허수아비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물론
포항으로 내려온 남편은 피곤함도 잊고 새로운 삶의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을 당당하게 대할 수도 없고
그저 지워버려야 할 기억을 가슴속에 안고 상처의 아픔을 달랠 뿐이었다.
멀지 않아 바캉스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부둣가에 모습을 나타 낼 계절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그녀의 마음처럼 마구
식어가고 있다. 지선이 커피 한 모금을 훌쩍 들이키는데 현관의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시간에 찾아 올 사람이 없기에
지선은 액정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지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한 동안
연락이 없던 그녀의 여동생 지영의 모습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지영의 목소리가 멜로디처럼 들렸다.
“언니!... 놀랬지?...............................................”
“연락도 없이 웬일이니?.......................................”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봐..............................”
“들어와...................................”
지선의 담담한 표정에 지영은 새침해졌다. 거실에는 걸음을 배우기 시작한 송이가 뒤뚱거리며 걷다가 기어갔다. 지영이 얼른
송이를 들어서 안고 소파에 앉았다. 지영을 마주하고 앉은 지선이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웬일로 온 거니?......................”
“언니는!... 내가 꼭 이유가 있어서 와야 돼나... 엄마가 소식도 없다고 걱정하시더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
“어떻게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형부가 잘 해주지 않는가보구나?.................................”
“.........!...............................”
“그런데도... 뱃살이 쪘나봐.............................”
“.........!............................................”
동생의 말에 지선은 흠칫하였다. 아직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떤 대책도 없지만 무작정 상민의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그녀였다. 그리고 남편이 무엇을 잘해주는지 남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녀는
새삼스럽게 떠 올랐다. 지영은 아버지가 허리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다녀왔고 어머니가 지선을 한번 다녀가라는 등의 집안
식구 얘기를 했다. 그리고 지영이 지나치는 말로 상민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지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니... 그리고 말이야... 언니가 데리고 있던 그 시댁 조카 상민을 예식장에서 봤어................................”
“..........!?.....................................”
“더 멀쑥해졌더군... 친구 결혼식인데... 그 친구의 여동생의 애인인가 봐... 무척 다정해 보이고 더라고......................”
“..........!........................................”
“세상은 정말 좁은 거 같아... 거기서 상민을 만날 줄이야!.........................................”
“..............................................”
흘려듣는 것처럼 무관심한 지선의 표정이지만 지영의 말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은 상민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정이었고 지선 자신도 잊으려고 노력했으면서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보다 더한 아픔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상민에 대한 애정은 끈질기게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
자괴감에 젖은 지선은 갈매기가 날고 잇는 항구와 바다가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기대할 수 없었던 희망의 연줄이 끊어져
바다 바람에 날아가는 허망함에 젖었다. 지선이 바라보고 있는 항구의 건물 중에는 남편의 직장도 있었다. 거대한 철골과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선박을 제조하는 큰 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공장들 앞의 선착장에는 제조중이거나 수리중인
유조선들이 철골을 들어내고 있었다. 경호는 유조선의 철골위에 앉아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 뿜었다.
뿜어내는 하얀 담배 연기마다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바닷바람에 날려 사라져갔다. 한 숨을 내쉬는 경호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경호 나름대로 사랑을 표시하려는 아내 앞에서 희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결과 때문에 요즘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에 대한 문제로 고통스러워 피우지 않던 담배도 요즘 그는 피우고 있었다.
아내의 생명력을 잃은 생활과는 달리 경호는 무능할 수밖에 없는 지난 시간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내의
우울증도 자신의 탓이라고 받아 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아내를 조금씩 의심을 하게 되고 그 의심이 확인되는
결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아내지만 경호는 아주 힘든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자궁에 염증이 났다는 것도 그는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자재과 책임자로 발령 받았다고 하지만 선박까지 자재를 직접 운반하고 때로는 현장지원을 하는 막노동까지 해야 하는 아주
고달픈 직책이었다. 회사 말로는 노조와 인건비관계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항상 지쳐서
귀가하는 경호도 피곤하여 부부관계를 하고 싶지도 않지만 아내가 너무 긴 시간동안 치료를 받는다는 것도 의심이 갔다.
그런데 일주일 전에 회사 업무 때문에 시내로 나갔다가 우연히 아내를 발견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하려는 반가움에 다가가던
경호는 멈추어 섰다. 아내가 산부인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아내의 뒤를 미행했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 기다렸다.
병원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다가가려던 경호는 멈칫했다.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 같았으나 마음이 편해져 살이 찌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경호는 문득 의아심이 들었다.
아내를 만나려던 경호는 몸을 숨겼다가 병원으로 들어갔다. 간호사에게 아내를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다고 하였다. 아내의
건강이 걱정이 돼서 그러니 진료기록을 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으로 간호사가 아내와 아기는 아주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경호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간호사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하였다. 그날 경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내가 임신했다면 기뻐해야하건만 좌절감을 느낀 그는 병원 입구의 계단에 주저 앉았다. 아내가 자신의 아기를 임신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만이 알고 있었다. 성격이 무뚝뚝한 탓도 있지만 아내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성적인 열등감을 느꼈다.
예비군 교육장에서 동료들이 정관수술을 받으면 정력이 강화된다는 말에 수술을 받았었다.
물론 수술 후에도 임신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경호는 아내와 부부관계를 한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결국 경호가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경호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는 아내와 이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경호는 희망을 포기하고 싶었다.
부모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모가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결과가 그는 두려웠다.
어떤 해결도 할 수없는 그는 며칠 동안 혼자만의 고통스러움에 빠져 있었다. 아내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리는
경호는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다에 힘껏 던졌다. 그는 파도치는 바다로 뛰어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한 숨을 내쉬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갑판 꼭대기에서 작업하던 반장의 고함소리였다.
“그러고 있지 말고... 자재를 가져다 줘야 일을 끝낼 거 아냐!................................”
“...................................”
재촉하는 반장의 목소리에 경호는 부스스 일어나서 철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부하직원이 두 명이 있지만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자멸감에 젖은 경호는 일을 하기도 싫었다. 단지 그는 넋을 잃고 반사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철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발걸음이 뒤뚱거렸다. 창고로 가서 자재 상자를 짊어진 그는 다시 선조중인 유조선을 올라갔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선박에 오른 경호는 작업반장이 일하고 있는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불같이 달아오른 태양에 아주 눈이
부시고 현기증이 났다. 그는 다시 높은 철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어깨에 짊어진 자재상자가 흔들려서 그는 휘청거렸다.
간신히 발걸음을 한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을 옮기던 경호는 아차 싶었다.
철 사다리 밑으로 그의 발이 빠진 것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자재상자가 미끄러져 내리려 했다. 흘러내리는 자재 상자를
엉겁결에 붙잡으려던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다. 그의 몸이 높은 철 사다리에서 추락해 내리면서 갑판의 철골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요란한 소리를 냈다.
“뭐야.........!?............................................”
“무슨 소리지?.........................................”
선박위에서 일하고 있던 작업반 요원들이 갑판을 내려다보고 놀라서 허겁지겁 내려오기 시작했다. 철골 무더기에 틀어박힌
경호의 머리와 가슴에서는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갑판위로 작업반원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작업 반장은
황급히 무전기로 사무실에 긴급 상황을 통보하고 작업 반원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거칠게 밀려온 파도는 추억의 아픔을 남겨놓고 흔적도 없이 밀려 나가기를 반복한다. 출렁이는 파도 위로 갈매기들이 애달픈
목소리를 흘리며 선회를 한다. 잠든 송이를 안은 지선은 아주 넋을 놓고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다녀가면서 남긴 말을 되새겼다.
“언니!... 이렇게 살 것을 왜 결혼했어?... 언니 같은 모습되기 싫고... 정말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면... 나는 결혼 안할 거야...
하지만....... 산다는 것이 별 겻인가... 이왕 결혼해서 사는 건데... 힘을 좀 내라고.............................”
“사랑.......!?....................................”
지선은 과연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되돌아 봤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남편은 아니었다. 부모님 말고
그녀가 떠올릴 사람은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었던 상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민을 잊으려하면서도
아기를 낳으려고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상민이 사랑의 증표로 백화점에서 구해주었던 것이었다. 목걸이를 볼 때마다
상처가 들어나는 것 같아서 몇 번인가 없애 버리려고 하던 그녀는 언젠가 뱃속에 아기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창문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지선은 전화 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송이네... 집인데요......................................”
“박경호씨... 댁이지요?.....................................”
“네... 제가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만................................”
“저는... 회사의 인사과장입니다... 급한 일로 연락 드렸는데... 남편께서 사고를 당해 해운병원 응급실에 있습니다............”
“네!?... 뭐라고요.........?...........................................”
“남편께서 응급실에 있는데... 생명이 위급합니다....................................”
“뭐... 뭐라고요........?.................................”
“생명이 위급하니 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하늘이 아주 노랗게 보이는 지선은 상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깊은 정 없이 살고 있어도 그녀의 남편이었다. 위급
상황을 반복해서 알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수화기를 들고 있는 지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수화기를 놓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남편은 송이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남편에게 의지하여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소복을 한 지선은 장례식장의 외진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예식장 안에는 친정 부모와 시댁 부모들 그리고 식구들이 아주 분주하게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남편은 숨을 거둔 후였다. 남편의 죽음은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지난 며칠간을 그녀는 물 한 모급
제대로 마시지 못하면서 무슨 정신으로 지탱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침울한 표정으로 집을 나가던 남편의 모습이 지선에게 마지막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의 마음은 아주
공허하기만 했다. 그녀는 이제 와서 말 한마디 안 남기고 떠나간 남편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원망스러워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책상에서 낙서하듯이 휘갈겨 쓴 메모장을 보았다. 정관수술, 아내의 임신, 아내의 행복, 나의 불행 등의 단어를
보고 지선은 남편도 임신한 사실을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았다.
상민의 아기를 임신한 것이 어쩌면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지선은 실끈같이 잡고 있던 삶의 의욕을 포기
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포항으로 내려오면서 희망으로 가득했던 남편의 얼굴이 떠 올리는 지선은 현기증을 느꼈다. 벽에
기대 한 숨을 내쉬는 그녀가 있는 골방으로 송이가 기어서 들어왔다. 뒤따라 50이 넘은 지선의 큰시누이가 쫓아 들어왔다.
“어이구!... 불쌍한 송이!... 엄마 힘들게 하려고 그러지....................................”
송이를 안은 시누이가 지선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지선의 동생인 지영이도 방으로 들어왔다. 그 시누이는 바로 남편의
큰 누나이고 상민의 어머니였다. 지영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선을 바라보며 방문 앞에 앉았다. 시누이가 지선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떡해!... 죽은 내동생도 안타깝지만... 올케가 힘을 내야지... 운명은 재천이라는데..........................”
“.....................................”
“못난 놈!... 유복자나 만들지 말고 죽을 것이지..............................”
“............................................”
벽을 응시하고 있는 지선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누이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지영도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냈다. 시누이의 유복자라는 말에 지선은 울컥 설움이 북 받쳤다.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생명이기에
지선의 상처를 도려내는 슬픔이었다. 그녀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말은 시누이의 말이었다.
“올케는 아직 젊으니까... 용기를 가져... 우리... 올케같이 착한 여자도 없을 거야... 시집식구들한테 싹싹하고... 남편에게
다소곳하며... 조신하다고 칭찬받는 여자가 어디 흔한가.................................”
“.......................................”
“지금...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가서 못 왔지만... 상민이도 외숙모가 잘해줘서 항상 고맙다고 했었지... 상민이도 올케 같은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
상민에 관한 말에 긴장한 지선은 흠칫하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불쑥 솟아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시누이나
지영에게 자신의 표정이 들어나지 않았는지 지선은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상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아주
실망스러웠다. 물론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야하기에 인연이 아니고 포기했다고 지선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민에 대한 많은
열정의 불씨는 그녀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마친 후 지선은 삶과 애정에 대한 갈등 속에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배가 부른 상태에서 다시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어차피 남편과의 삶도 아주 행복하지 못했고 이룰 수 없는 상민과의 사랑에 상처를 지우고 그녀는 혼자만의
삶이라도 작은 행복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영혼이 있는 포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회사에서 나온 위로금과 보험금으로 아주 작은 점포라도 운영하면서 꿋꿋하게 살고 싶은 소망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남편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송이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조용하게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녀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현관의 차임벨이 울렸다. 모니터를 들여다 본 그녀는 이삿짐센터에서 온 것을 확인하고
현관 스위치를 눌렀다. 시계바늘은 인간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세월은 가라고 하지 않아도 흘러가고 다시 똑같은 계절을 반복해서 맞이한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짙푸르렀던
가로수에서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하얀 구름이 떠있는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공항 주위를 돌던 항공기가 활주로에 미끄러져
내려왔다. 독일에서 출발했던 항공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이 입국절차를 받고 입국장으로 몰려 나왔다. 대합실에는 입국하는
승객들을 맞이하려는 가족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승객들을 마중 나온 가족들의 어깨너머로 무척 귀여운 얼굴의 여대생이 발
돋음을 하고 입국장을 살폈다. 그녀는 상민의 귀국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미나였다.
“상민씨!... 여기야... 여기..................................”
환한 미소를 흘린 미나는 입국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방을 끌고 나오던 청년이 미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주 짧은 머리에 깔끔한 모습으로 나오는 청년은 교환학생으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상민이었다. 상민은 이따금
미나와 편지로 안부를 묻거나 국제전화를 했었다.
입국장의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간 미나가 상민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반가움에 상민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엉겁결에 입맞춤을 한 상민은 잠시 당황을 했다. 평소 활달하면서도 스킨십조차 두려워했던 그녀였다. 그만큼
도도한 면이 있었던 그녀이기에 상민은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미나!... 많이 발전 했는데..............................”
“피 잇~! 뭐... 어때!... 무사히 돌아오면 뽀뽀해준다고 했잖아.............................”
얼굴을 붉히는 미나가 눈을 흘겼다. 주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아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누군가를 찾는지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리는 상민의 얼굴에 실망스런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 밝은 표정을 지은 상민은 미나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대합실을 나와 택시를 타려고 승차장으로 걸어가는 상민을 미나가 붙잡았다.
“어디가려고.......!?.....................................”
“일단 택시타고 나가야지...............................”
“나... 차 가지고 왔어..................................”
“누구 차인데?...............................”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준거야...............................”
미나가 생글거리며 상민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들은 방향을 바꿔서 주차장으로 향해 갔다. 주차장에서 미나는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승용차로 상민을 안내했다. 미나는 조금은 서툰 운전 솜씨로 승용차를 몰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퇴근시간이라서
도로가 혼잡하였다. 운전을 하는 미나는 상민을 곁눈질해서 보며 배시시 미소를 흘렸다. 더욱 윤곽이 뚜렷해지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상민의 모습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미나의 시선을 의식한 상민이 눈동자를 치뜨며 물었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아니... 다른 여자에게 상민 씨를 뺐길 것 같아서......................................”
“하하~!... 그럴 여자도 없지만... 내가 무슨 물건인가.................................”
“큭~!... 엉큼한 남자 속을 알 수 있나?.......................................”
“그럼... 여자 속은 앙큼한가!?... 미나야 말로 애인 생겼나봐... 예뻐졌는데...................................”
“난... 애인 같은 건... 귀찮아.....................................”
미나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정색을 했다. 그리고 이내 눈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흘렸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상민도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미나가 잡고 있는 핸들의 클랙숀을 장난스럽게 여러 번 두들겼다. 신호등을 대기 중이던 주변
차량의 사람들이 경적 소리에 놀라 모두 쳐다봤다. 화들짝 놀란 미나가 뽀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못됐어!... 사람들이 욕한단 말이야.................................”
“거짓말 하니까... 그렇지............................”
“거짓말은 무슨.......!?... 상민씨 오늘 어디 갈 건데?.................................”
“고향에 내려갔다 와야지..................................”
“내가 오늘 저녁 살게... 먹고 가면 안 돼?..............................”
“뭐... 사주려고?... 여자 입술이 제일 좋던데..........................”
“어 머!?... 공부는 안하고 엉뚱한 것만 배웠나봐... 사람이 이상해졌어.........................”
“하하하...................................”
얼굴을 붉힌 미나가 상민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그래도 웃고 있는 상민은 윙크를 하며 아주 짓궂은 표정을 했다. 신호등이
바뀌고 눈을 흘기던 미나가 승용차를 출발 시켰다. 그들은 서울 외곽 도로를 달려 하남시 인근의 한옥으로 된 음식점에 도착
했다. 차에서 내린 미나는 상민의 팔에 팔짱을 끼며 즐거워했다.
“아빠하고 같이 왔었던 곳인데... 조용하고 맛있어.............................”
“경치도... 좋고 아담하네...............................”
“단골손님이 많은 곳이야...................................”
한옥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복을 걸친 종업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석가래 지붕의 마루를 걸쳐 들어간 곳은 구들이 따뜻한
방이었다. 음식을 주문하니 전부 한식 음식으로 정결한 시골밥상이었다. 그러나 반찬도 맛깔스럽고 주인의 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다. 상민은 연수생활동안의 얘기들을 미나에게 전해주며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먹고 나오면서 미나가 물었다.
“지금 내려 갈 거야?... 내일가면 안 돼나..............................”
“술이라도 사주려고?..............................”
“남자들은 술밖에 몰라... 그냥... 같이 드라이브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부모님이 기다리니 다녀와야지.................................”
“그럼... 내가 기차역까지 데려다 줄게.............................”
“내가... 운전할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미나가 승용차 키를 상민에게 넘겨주었다. 차 열쇠를 받은 상민이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미나가 올라타고
상민이 승용차를 몰고 나갔다. 어둠이 살짝 내려앉기 시작한 도로의 양쪽으로 가로수와 코스모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콧노래를 하던 미나가 불쑥 물었다.
“다음에 또 오자... 맛 있었지?..........................................”
“글쎄........ 여자 입술이 더 맛있다고 그랬잖아.....................................”
“또... 그런다... 징그러 죽겠어.....................................”
“하하하.......................................”
상민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눈을 흘기는 미나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민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좋아!... 소원이라면 한 번 더 해줄게.................................”
“.........!?.....................................”
배시시 미소를 흘린 미나가 불쑥 상민의 뺨을 붙잡고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그녀는 얼른 얼굴을 둘렸다.
하지만 상민의 행동이 더 빨랐다. 기다렸던 것처럼 핸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긴 상민이 동시에 그녀의 머리를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상민의 행동에 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민의 입술에 막혀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읍..............................................”
“..........................................”
입술을 뺐긴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키면서 주먹으로 상민의 등을 두들겼다. 그러나 상민이 팔에 어깨를 감싸인 그녀는 좌석에
깊이 묻혔다. 그리고 입술이 상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녀는 숨 막히는 열기에 빠져 들었다. 진한 키스를 하던 상민이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빨아 당겼다. 미나는 간단한 입맞춤의 경험은 있으나 남자와 농도 깊은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시... 싫어.......................................”
그녀의 거부하는 목소리는 상민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미나는 온 몸의 돌기들이 모두 상민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상민의 등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녀는 단지 상민의 스킨십에 황홀함에
젖을 뿐이었다. 혀를 유린하던 상민의 혀가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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