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선의 선택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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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은 사표를 쓴지 2주 만에 인수인계를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완전히 회사에서 나왔다. 점심시간외 평일 날 이렇게
밖에 나와보는 것이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동철은 집으로 갈까 하다가 아내와 점심을 함께 먹을 요량으로 아내 가게로 방향을 잡고, 아내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은선아, 나야. 지금 회사에서 나왔어. 점심 사갈까?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응, 그래? 그러면 나 쫄면 먹고 싶은데…… 올 때 건너편 분식집에서 사올래요?”
“알았어, 30분 정도 걸릴 거야”
동철은 분식집에 도착해서 쫄면과 만두, 튀김을 넉넉히 사고 나와서 은선의 가게 건너편 건널목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아내의 가게를 보니 간판이 좀 낡은 것 같아서 퇴직금이 나오면 간판부터 새로 깔끔하게 갈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내의 가게 쇼 윈도우 밖에서 누군가 가게 안을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손님이겠거니 했지만 안을
들여다 보는 모습이 뭔가 수상하고 무언가를 숨어서 훔쳐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건널목을 건너가면서 아내의 가게가 가까워지자 동철은 그 남자가 건물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영감이 저기서 뭐 하는 거지? 괜히 기분 나쁘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어이…… 난 또 누구시라구…… 오랜만이네요”
“건강하시지요?”
“그럼요, 허허허”
송 영감은 건강 하나는 자신 있다는 듯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며 건강을 과시했다. 동철은 간단히 인사를 끝내고 아내의 가게로 들어갔다. 은선은 선반 위에 올라가 가게 안쪽의 벽에 걸린 옷들을 다른 옷으로 교체하고 있었다. 은선은 얇은 실크치마를 입고 있었고, 선반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어서 얇은 치마 때문에 엉덩이 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동철을 본 은선은 하던 일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선반에서 내려오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서 아내의 허연 허벅지가 안쪽 깊숙이 보였다. 동철은 자신의
위치에서 뒤를 돌아보고 송 영감이 서있던 자리를 보니 송 영감이 아내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 영감 탱이가 뭘 보고 있던 거야?’
“은선아, 뭐 하는 거야?”
“아.. 저거요? 그냥 장사도 잘 안되고 해서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일단 이거 먹고 하자”
“그래요. 맛있겠다”
동철과 은선은 동철이 사온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당신 퇴직금은 언제 나와요?”
“이제 나오겠지. 오늘 부로 완전히 퇴사했으니까”
“다음 월세 낼 때까지는 나오면 좋겠는데.. 애들 학원비도 내야하고..”
“이번 주에 나오지 않을까? 총무부에 물어보고 올걸 그랬나..”
분식으로 식사를 마친 동철은 아내가 하던 일을 도와서 끝내고, 일단 오늘은 아내로부터 재고 정리하는 일을 먼저 배우기로
하고,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옷들부터 장부와 맞춰보았다. 약 한 시간쯤 옷만 만지며 가게 안에 있다 보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은선이는 하루 종일 어떻게 이렇게 하지?’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가 넘었다. 사무실에 있을 땐 졸리는 시간이어서 담배를 피우러 비상계단으로 가곤 하던 시간이었다.
“은선아, 담배 피고 올게”
“네”
동철은 밖으로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건물 계단 쪽으로 걸어가 현관입구 계단 옆에 서서 담배를 한대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까 은선이와 하던 이야기 중 퇴직금 이 생각나 이 참에 총무부에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총무부 김미영입니다”
“어.. 미스 김, 난데 혹시 김과장 있어?”
“아.. 예, 과장님, 잘 들어가셨어요?”
“응, 그래”
“잠시만요. 과장님 자리로 돌려 드릴께요”
“경리과, 김충식과장입니다”
“김과장! 나야”
“어, 그래, 자네 아직 회사지?”
“아니, 아까 나왔지”
“오늘 소주한잔 하자니까.. 벌써 갔어? 동기들 다 떠나고 자네하고 나만 남았었는데 이제 자네도 가고 나만 남았네”
“그래, 나중에. 나중에 한잔하자. 어쨌든 힘들 때 혼자 떠나서 미안하네”
“그건 그렇고,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응, 혹시 말이야.. 퇴직금이 언제 나오나 해서.. 사실 자금사정 어려운 것 아는데..”
“아, 그거.. 자네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알다시피 지금 회사 자금사정이 많이 안 좋잖아. 그래도 내가 딴 건 몰라도 동기생
퇴사하는데, 퇴직금은 빨리 챙겨주려고 바로 입안해서 부장님께 올렸는데, 부장님이 지금 자금사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사장님한테 지금 결재 못 올린다고 그러지 않아도 자네한테 좀 늦어진다고 양해를 구하라고 하시더라고. 늦어지는 만큼 이자는 쳐서 줄 거야.”
“아, 그래?”
“왜? 급한가? 자네 와이프도 벌고 자네 괜찮잖아. 부장님도 이번 정기인사에 이사자리 노리는 것 같은데 사장님한테 부담
주기 싫겠지. 안 그런가? 어차피 받을 돈이고, 빨리 받아도 은행에 있을 돈 아닌가? 걱정 말고, 이 참에 푹 쉬어. 어디 여행도
가고 그러게. 결재 나면 내가 미스 김 시켜서 바로 통장으로 넣어 줄게”
“으..응, 그러지.. 알겠네. 그럼 잘 있게. 또 연락 할게”
“그래, 그럼 조만간 보자. 들어가”
동철은 왠지 불안했다. 자금사정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몇 억도 아니고, 퇴직금 몇 천 만원도 못 줄 정도로 회사에 자금이 말라 버린 지는 몰랐다. 퇴직금을 은근히 기대하던 아내의 실망한 얼굴이 떠올랐다.
“왜? 왜 안준데요?”
“어려운가 봐.. 회사 자금사정이 많이 안 좋거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퇴직금은 당연히 줘야지”
동철은 그러지 않아도 퇴직금을 바로 지급받지 못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아내의 말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안 준다는 게 아니라 조금 있다가 자금사정이 나아지면 준대 잔아!”
“알았어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미안해.. 그냥 좀 짜증나서..”
동철은 하던 재고장부정리를 덮고,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밖으로 나갔다. 가게 옆 치킨가게에서 배달 나가는 주인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담배연기를 내뿜는데 건물 현관에서 송 영감이 나왔다.
“바깥양반, 아직 안 갔네?”
“아…예.. “
“은선씨 가게에 투자한다며?”
“아..예.. 퇴직금 받으면..”
“나도 투자를 좀 하려고 했었는데..”
“아.. 그러세요?”
동철은 송 영감의 투자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일단 송 영감한테 투자를 받아서 가게 운영을 원활히 하다가 퇴직금이 나오면 송 영감의 돈을 갚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송 영감은 동철의 아내가 마음에 들어 어떡하든 그녀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걸고 싶었고, 사업상 투자라도 하면 언제든지 드나들며 그녀를 볼 수 있으니 좋고, 혹시 사업이 망하더라도
임대보증금 받아 놓은 게 있으니 투자금은 그걸로 충당하면 손해는 안보는 장사였다.
“송사장님, 저와 잠시 얘기 좀…”
“무슨..?”
“투자하시고 싶으시다면서요? 아직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 그거? 글쎄..요즘 현찰이 잘 안 돌아서 말이야…”
눈치 빠른 송 영감은 동철의 투자이야기에 이 사람들이 뭔가 일이 뜻대로 안되고 있다고 눈치를 챘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상대해온 경험상 협상의 우위를 갖기 위해 관심 없는 척 일단 한번 튕겼다.
“송사장님,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일단 저기 들어가서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시면서 이야기 하시죠”
동철은 은선의 가게 옆 치킨 집을 향해 송 영감의 팔을 잡아 끌었고, 송 영감은 못 이기는 척 하며 동철과 함께 치킨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당신 안사람이 사장 아닌가? 투자를 하건 뭘 하건 당신 안사람하고 이야기 해야지 되는 것 아닌가요? ”
“아..예, 당연히 그렇죠. 전 다만 투자 의사가 있으시니 그 결정을 빨리 해 주십사 하고..”
“아.. 글쎄, 요새 돈이 안 돌아서..”
“아.. 왜 그러십니까, 이 동네에서 송 사장님 하면 이 동네에서 재력으로는 제일 인 거 알 사람은 다 아는데..”
“어쨌든 이 자리에서 이럴게 아니라 나중에 정식으로 얘기나 들어보세”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7시에 가게 문닫고 저녁 같이 하실까요? 시간 괜찮으시면 와이프 에게 이야기 해놓겠습니다.”
“그러던지..”
“좋습니다..캬~ 시원하다”
송 영감은 동철의 아내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내심 좋았지만 겉으론 관심 없는 척 얼버무리며 앞에 놓인 튀긴 닭다리를 뜯었고, 동철은 반정도 남은 생맥주를 한번에 쭈욱 마시며 마치 송 영감에게 이미 투자를 받아 낸 것처럼 기분 좋게 잔을 내려 놓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서둘러 계산대로 갔다. 송 영감도 남은 잔을 비우고, 접시에 남아있는 후라이드 치킨을 종업원에게 싸달라고 하며, 들고 있는 닭다리의 남은 살을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송 영감과 헤어진 동철은 아내의 옷 가게로 돌아와 은선에게 오늘 가게 문 닫고 건물주인과 저녁식사를 잡았다고 했고, 은선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송 영감이라는 말에 썩 유쾌하진 않았다.
“왜? 저녁 식사하는 데요?”
“왜긴, 투자 건 때문이지”
“무슨 투자? 우리가게에?
“응, 일단 송 영감한테 투자를 받아서 급한 불부터 끄고, 나중에 퇴직금 나오면 송 영감 돈 갚아버리자 구. 그리고 송 영감이
투자하면 이제 사업파트너가 되는데 월세를 깎아주거나 좀 늦게 내도 되지 않겠어?”
“행여나 그 구두쇠가..”
“어쨌든 이따가 저녁 먹으면서 상의해보자. 어쨌든 투자 받는 게 중요하니까..”
“알았어요. 어머님께 전화 드리세요. 오늘 애들 저녁 먹고 데리러 간다고..”
“알았어”
저녁까지 서너 명의 손님이 더 다녀갔으나 판매로 이어지진 않았고, 오늘의 매상은 근래 들어 최악을 기록하였다. 은선의 의류매장은 최근엔 거의 매일 최저의 매상을 기록할 정도로 실적이 저조했다. 7시가 가까워오자 손님도 없고, 동철은 빨리 송 영감을 만나 투자 건을 해결하고 싶어 서둘러 마감 정리를 시작했다.
“다 정리 되셨나?”
“아, 오셨어요? 금방 끝나는데.. 여보, 당신이 먼저 송 사장님 모시고 가세요. 내가 금방 마감 끝내고 갈게요”
“그럴까? 그러시죠. 그럼 어디로 갈까요?..”
“오늘 저녁은 지하철역 사거리에 있는 형제숯불집 어떤가?”
“그러시죠. 여보 형제숯불집으로 와. 먼저 가 있을게. 가시죠”
“알았어요”
동철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송 영감을 귀빈 다루듯 송 영감도 잘아는 갈 길을 손으로 방향을 잡으며 매장에서 나갔다.
은선은 형제숯불집에 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집 고기와 음식은 다 맛있고 괜찮은데 한가지 불편한 것이 구두를 벗고
들어가 바닥에 앉아야 하는 자리만 있는 식당이라 오늘같이 치마를 입고 온 날은 식사할 일이 있어도 그런 집은 피했었다.
특히, 오늘처럼 짧고 얇은 치마를 입었을 때 바닥에 앉으면 거의 허벅지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은선은 서둘러 마감을 끝내고, 거울을 한번 들여다 보고, 바지로 갈아입고 갈까 잠깐 망설이다가 저녁 먹는다고
또,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것도 웃기는 것 같아서 불을 끄고 그냥 가게를 나섰다.
식당에 도착해보니 남편과 송 영감은 벌써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런데 은선의 자리가 송 영감의 옆에 셋팅이 되어 있었다.
은선이 잠깐 어색해서 자리에 앉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동철이 웃으며 송 영감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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