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무원 -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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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날도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공항과 기내에서 자신과 마주친
수많은 남자들의 머리 속에서 자신이 강간당하고 겁탈당하고 희롱당했으며 격렬하고 아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등 수많은
남자들의 상상 속 섹스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행기 밖의 하늘에서 비가 지상으로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저 지상으로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습관이 되었지만 여전히 비오는 날의 비행은 아주 찝찝하다. 비 오는 날 하늘에서 일어나는 터뷸런스도
여전히 두렵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은근히 불안하고 두려운 심정속에서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그리움과 기쁨이 남몰래
모락모락 피어나며 한줄기 위안과 설레이는 기대감을 안겨준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는 남자 어딜가든 뭘 하든 내 생각 해주는 남자 행동하기에 앞서 내 기분을 생각해주는 남자 내가
아프면 더 아파하는 남자 내 신발끈이 풀리면 무릎 꿇고 묶어주는 남자 전화 끊을 때 내가 먼저 끊기 전엔 안 끊는 남자 지갑
속에 내 사진을 넣고 다니는 남자 담배 달라고 해도 화내지 않고 망설임 없이 건네주는 남자 말할 때 눈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남자 그래서 짖궂은 장난을 쳐도 농담을 걸어도 싫지 않게 만드는 남자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 해주는 남자 눈 앞에 두고서도
보고 싶다고 솔직히 말해주는 남자 보고 싶다고 말해주면서 눈물 흘리는 남자 날 위해서 내 앞에서 두번 씩이나 울어주었던
남자 내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해 주던 남자 내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던 남자 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줄 수 있도록
만든 남자 나 그래서 이 남자를 사랑합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고 나 또한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뉴델리의 아침해에 당신의 손이
걸려있고 상하이의 홍등에 당신의 웃음이 빛나고 있으며 시드니의 녹음 속에 당신의 눈동자가 비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도쿄의 분주함 속에서 당신의 짖궂은 농담이 기억나게 될 것이고 사이판의 설레임 속에서 당신과 나누는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나 지금 당신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다. 혜미가 자리하고 있을 저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지상으로 억수같은 비가 퍼부어대고 있다. 저녁인데도 넓은 공항의 이곳 저곳이 나름대로 분주하기만 하다. 세상은 넓고
넓은 땅이 다 받아들이기는 힘들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그 땅 위에 살고있다. 각자 생존을 위해, 혹은 즐거움을 위해 이 땅과
세계의 각지로 부지런히들 오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실어나르는데 일조하고 있는 그녀들 하늘에는 언제나 그녀들이 존재하며 하늘을 통해 세상의 이곳저곳을
오가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하고 있다. 공항 안을 오가며 걷고있는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걸친 젊은 여승무원들 상처입은
힘든 몸으로도 애써 지탱하며 긴 비행을 나간 혜미처럼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녀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사람들이다. 내가 알고있는 것은 그녀들 직업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녀들의 대부분은 새벽 3시가 될 수 도 있고 아니면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온 몸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푸석푸석한 몸을 추스리며 머리털 한가닥이라도 빠져나올까 승객 앞에서 단정한 머리결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고정
스프레이로 머리를 만들고 있다. 야간 비행에서의 피로로 빨갛게 충혈된 눈을 내놓지 않기 위해 안약을 넣고 있다. 하늘에서
14시간을 두 세 시간 정도만 쉬면서 남들이 곤히 잠든 시간에 밤새 걸으면서 태평양을 건너는 퉁퉁 부은 발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보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입맛대로 골라먹고 있는 듯한 그녀들에겐 이륙후 3시간 동안 물수건을 나눠주랴 음료수를
나눠주랴 술을 나눠주랴 식사를 나눠주랴 다시 걷어가랴 차와 와인을 따라주랴 머리를 풀고서 널 뛰는 버전으로 정신없이
서비스를 마친 후 제대로 된 식탁이 아닌 천천히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닌 선배들과 동료들의 눈치를 보면서 갤리라는
비행기에서 제일로 번잡하고 지저분한 곳에서 손님들에게 서비스하느라 다 식어버린 음식을 혹시나 커튼을 확 열고 들어올
승객들을 걱정하면서 음식 준비하던 작은 선반 위에서 이미 식어버린 식사를 서서 먹고 있는 뒷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한껏 멋을 부리며 가방을 끼고 도도히 걷고 있는 듯한 그녀들의 갸냘픈 예쁜 팔은 750ml 와인 네 병을 겨우겨우 한쪽 팔에
끼우고 자기자신도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의 맛과 품종을 설명하면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한방울이라도 흘릴까 손님의
눈치 보면서 가장 우아한 폼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와인 잔에 정확히 쏟아붓는 애처로운 뒷모습을 숨기고 있다.
콧대 높아 보이는 그녀들은 실제로는 괜히 생트집 잡고 싶어하는 몇살 먹지도 않은 일부 승객들에게 “야.. 너 사무장 불러와”
라는 말을 듣고 있다. 사실은 별 다른 잘못도 없는 그녀들은 혹 팀이나 동료들에게 인사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양아치
같은 싸가지 없는 일부 승객들에게 한없이 안절부절하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울먹이며 사과하고 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듯이 또 다시 욕설을 퍼붓는 그들에게 거듭하여 똑같은 사과를 하면서 갸냘픈 무릎을 꿇고 빌기도
한다. 토하고 변기가 막혀서 진짜 쳐다 보기도 싫은 화장실을 그녀들은 말 없이 비닐 장갑만 끼운 손으로 묵묵히 깨끗이 다
치워내고 있다. 그녀들의 일반 직장인보다 꽤 많다고 생각되는 불로소득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는 보수는 실제로는 만성
만성 신경성 위염에 0.8기압의 근무에 따른 혈압 이상과 말초신경 이상 시차가 늘 바뀌는 멍한 바이오 사이클의 파괴 근육
피로증과 칼슘이 일반인 보다 많이 빠지는 골다공증 등등의 위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해외 스테이션에서 아파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호텔방에서 외로움과 아픔을 이기면서 열심히 벌어가고 있는 정당한 보수일 뿐이다.
세상에 무슨 공짜가 있겠는가. 거대기업 항공사에서 그냥 인심쓴다고 많은 급여를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들은 꼭
비싼 것만 먹기만을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녀와 만날 땐 라면 한 그릇이라도 자신의 능력에 맞는 식당에 가서 자신의
성의가 묻은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사 준다면 그녀는 만족할 것이다.
비행 다녀와서 며칠 씩 쉰다고 부러워 하지 마라. 이미 골병 들어 아픈 몸 조금이나마 추스리는 시간이니 속이나 뒤집어 놓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살펴 준다면 그것 만으로도 그녀는 그녀를 이해해주는 당신에게 감격하고 고마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 중의 하나 조혜미. 나는 이 곳에서 혜미를 기다리고 있다. 어서 빨리 혜미를 보고 싶다.
유니폼을 입고 이 곳으로 되돌아올 아름다운 여승무원 조혜미를 다시 보는 순간 언제나 그렇듯이 난 무척 기뻐할 것이다.
마음이 설레이게 될 것이다. 나는 여승무원을 사랑하고 있다. 나를 만났을 때 어딘가 등을 붙일 수 있는 곳만 있다면 아주 푹
파묻히듯이 앉는 그녀 그리고 때로는 나를 상관않고 그대로 꾸벅꾸벅 졸고있는 그녀 전혀 들어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가끔씩
직업병인지 말 끝에 “....니다...” 를 붙이는 그녀 칠칠맞게 몸 여기저기 멍이나 데인 자국들을 훈장처럼 붙이고 나타나 나를
속상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녀 나의 수줍은 작은 속삭임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아주 무안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녀 그녀는
최소한 의 짧은 휴식기간 내에 시차를 적응해야 하고 그마저도 나를 만나는데 애를 쓰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괜히 딴지 걸기를 좋아하는 일부 무례한에게 트집 잡히는 일이 일상이 되어 가고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돌아서면 웃는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다니면서 먹었던 여러
나라의 음식들은 나중에 그녀가 비행을 그만두는 순간 영원한 향수로 남을 것이다. 갤리라고 불리우는 그 좁은 공간에서 몇
백명의 승객들의 식사를 챙기다 보면 자신이 데었는지 멍이 들었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될 정도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잦은 기압의 변화로 인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다치고 상처입은 그녀의 작은 귀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사람의 낮은 목소리를 제대로 못 알아들어가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바쁜 일상속에서 갈수록 그녀를 그리워
하고 있다. 내가 기다리는 그녀는 그 그리움 속에서도 걷고 또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에게 그것들을 모두
알아달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지나왔던 힘들었던 과거의 아픔과 슬픔조차도 알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나는 강한 그녀를 더욱 더 강하게도 한없이 약한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졸고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다. 입을 뾰죽 내밀면서 투덜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줄
것이다. 다친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발라 줄 것이다. 다시한번 그녀의 잘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줄 것이다.
그리고 지켜봐 줄 것이다.
그러면 그녀에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이나마 밝은 웃음을 띄울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게 될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잊지 앉을 것이다. 나는 여승무원인 조혜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조혜미인 것이다. 하지만
설레임과 기대감 속에서도 뭔가 가슴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체모를 그 어떤 일말의 불안감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딱딱히 굳은 땅 속 깊숙히 묻혀있는 진실을 들춰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일은 쾌청하길
바라며 태양을 가린 구름을 치워내기라도 하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들 수고 하셨습니다!!.................................................................”
“네... 수고 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다들 서로 수고의 했다고 인사를 하고 남녀 승무원들은 각자 뿔뿔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어느 덧
밤 9시가 다 되어간다. 혜미도 방향을 옮겨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혜미의 곁에는 후배 소영과 희진이 함께 칵트를 끌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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